본문 바로가기

요한복음

(요13:36-38)우리의 연약함을 붙잡아주시는 예수님의 은혜

56:11~13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이까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서원함이 있사온즉 내가 감사제를 주께 드리리니,

주께서 내 생명을 사망에서 건지셨음이라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지 않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연약하여 내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고, 나보다 강하고 높은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편이심을 믿는다면 두려워할 것이 없고 모든 일에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 항상 하나님 앞에 서서, 생명의 빛에 날마다 다니므로 실족지 않고 승리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336-38.

 

1. 우리가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은총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베드로와 예수님 두 분간의 대화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에게 베드로와 동일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하셨는데, 베드로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한결같이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장담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군사들에게 체포되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다 도망하였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하였으면 어떤 제자는 베 홑이불마저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제자들을 보고 한심하다고 비겁한 겁쟁이라고 비판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이처럼 신앙의 자유가 보장되고 있는 사회 속에서도 진실로 신앙의 용기를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하며 보여 준 그 부끄러운 모습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끄럽고 나약하기 그지없던 제자들이 이후에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담대하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그 어떤 박해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앙의 용장들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다 순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의 결단과 용기를 통해 일어난 변화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와 자신을 배신한 제자들을 용서하심 때문이며,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제자들이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사도 된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부르심 때문이며, 이처럼 겁쟁이들이 신앙의 용사들로 변화되어 온전히 사명을 감당하게 된 것도 오직 그리스도의 은총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이 마치

나의 지혜와 결단으로 인한 것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과 주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 역시도

나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도 오직 예수님의 부르심 때문이며,

앞으로 예수님을 따르게 될 것도 오직 예수님의 용서와 사랑과,

성령님의 간구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매순간마다 예수님 만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겸손한 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도 항상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33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 고 하시자

36절에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질문을 라틴어로 옮기면 ‘쿠오바디스 도미네' 입니다.

여기서 초대 교회 시대의 기독교 박해를 소설화한 유명한 책제목이 이 말씀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 그리고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쿠오바디스’를 보면 극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즉 로마의 박해를 피해 급히 달아나는 베드로를 향해 멀리서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황급히 도망치는 베드로 옆을 스쳐 지나가시면서도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으시고 베드로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예수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가 피하여 달아나는 저 로마의 내 양을 위해 다시 십자가를 지러 로마로 간다”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큰 충격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오 주여! 용서하소서” 라고 부르짖으며 그 앞에 엎드리고 다시 발길을 돌려 로마로 돌아가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하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삶을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자신의 만족을 체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서는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타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람과 선행을 격려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타적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매 순간 선택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사는 우리는 매 순간 이타적인 삶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무장적 남을 위한 삶이 아니라 항상 하나님 뜻안에서 하나님에게로 인도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놓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사화복을 하나님께서 주관하심을 우리가 믿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 어떤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오로지 내 유익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사람에게 복을 줄 것입니까?

다른 사람을 전도하여 살리고 그 영혼을 구하려고 하는 이타적인 사람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내가 조금 손해를 보고 양보하고 남을 배려해주고 남을 도와주고 남을 위해주고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주어 그 영혼을 구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그렇치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손해 본 것 몇 배로 되갚아 주시고 큰 상급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기를 다짐하는 우리들은 오늘날 이런 시대 속에서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느 곳을 향하여 가시는지 끊임없이 물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비단옷을 입고 진수성찬에 앉은 자들에게 발걸음을 옮길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낮고 천한 자들에게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언제나 쫓는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의 약점을 모두 알고 계십니다.

37절과 38절은 주님께 대한 베드로의 부인 예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스스로에 대해 인간이 얼마나 무지한지, 또한 이에 반해 우리 주님은

우리에 대해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알고 계시는지 극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37절을 보면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주님께

베드로는 목숨까지 바쳐서라도 따르겠노라고 장담하였습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장담은 만용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베드로의 입장에서 보면 완전한 허장성세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 부르셨을 때 자신의 생계 수단인 그물을 비롯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베드로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던 자신이 어찌하여 앞으로는 따를 수 없느냐고 물으며 강한 자신감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전혀 달랐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데 대하여 강한 자신감을 보이는 베드로에게 칭찬하시는 대신

오히려 그의 말과는 반대로 정작 그 순간이 되면 그가 세 번이나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베드로에게는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과거 예수님의 수난을 만류하다가 예수님에게 ‘사단’ 이라는 책망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때도 지금보다는 예수님이 야속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충정을 무시해서 하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다만 그 누구보다 베드로의 인간적 연약함을 알고 계셨기에, 또한 미래를 내다보시는 통찰력이 있으셨기에 이것을 환기시키고자 이처럼 미리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대화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기자신이 자신을 가장 잘 안다고 믿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와 같이 강하고 똑똑한 사람도 달리 없다는 일종의 자만과 도취에 빠져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영국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말처럼 마치 밤톨 속에 앉아 있으면서도 천하의 중심에 앉아 있다고 착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친히 흙으로 인간을 지으심으로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아실 뿐만 아니라 다가올 십자가 사건이 얼마나 두려운 사건인가를 누구보다 분명하게 인식하고 계셨던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호언장담하는 베드로를 향해 질책하시는 대신

그의 연약함을 일깨워 주시고 또한 그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때 결코 우리의 의나 자랑거리를 내세우려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우리의 연약하고 부끄러운 점을 감추려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의 모든 것을 솔직하게 내어놓고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야합니다.

그때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보충해 주시고 부끄러운 점을 가리워 주심으로 날마다 새롭고 강한 존재로 변화되는 은총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베드로는 자신이 과거에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기 때문에

지금도 자신의 힘으로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잘 아시고 자상하게 일깨워 주시며

오히려 그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베드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 역시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다시 한번 분명하게 인식하며 날마다 우리의 연약함을 예수님 앞에 고백하는 기도를 쉬지 않도록 도와주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붙잡아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며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겸손한 제자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