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98-100 내가 주의 말씀을 지키려고 발을 금하여 모든 악한 길로 가지 아니하였사오며
주께서 나를 가르치셨으므로 내가 주의 규례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니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인생길에서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악한 길로 가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의 말씀으로 저희들을 가르치셨으므로 저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고 주님을 떠나지 않고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맛보고 경험해 보면 시들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맛은 항상 새롭고
언제나 즐거움이 되고 삶의 활력과 기쁨이 됩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나의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 받기를 소원하오니
말씀하여 주시옵시고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94장 예수님은 누구신가, 요한복음 11장24-26절
1.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 갑시다.
24.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4절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리라 하신 말씀에 대한 마르다의 대답으로
마르다는 이미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들어 믿고 있었고,
그래서 마지막 부활의 날에 자신의 오빠 나사로가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지금 당장 오빠가 살아난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어서,
부활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고, 지금은 너무나도 젊은 나이에 떠나버린 오빠의 죽음이
여전히 안타깝고 슬프고 아쉽기만 한 것입니다.
먼 훗날 자신이 죽어서 오빠에게 갈 소망은 있어도
지금 오빠가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희망은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마르다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유대교의 사두개파는 부활을 믿지 않았지만 바리새파는 부활을 믿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요5:28.29에서 부활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르다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른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먼 미래에 종말의 때에 부활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활의 성취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이 핵심입니다.
마지막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하시면서 이 세계의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날에 죽은 자들의 부활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예수님에 의해 성취됩니다.
그 증표로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나흘 만에 살리시고,
얼마 후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무덤에서 부활하십니다.
제자들은 나사로의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부활과 종말의 재림과 부활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마르다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들 역시 아직은 이 사실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 소생의 전과정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알게 하시고
사도 요한의 기록을 통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정확하게 재림의 예수님을 알게 하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로 이어졌고, 예수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소망만 있으면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나자신이 비록 약하다 하더라도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2. 부활신앙을 가질 때 우리는 영생합니다.
25.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주로 나타나는 ‘나는~ 무엇이다’라는 표현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도 예수님은 먼저 말씀하시고 말씀한 것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부활이 먼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현재에도 일어날 일임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먼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지 말고 예수 안에서 언제나 현재의 일로 여기고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먼 미래의 일로, 종말에 있을 부활을 현재적 사건으로 앞당기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의 소생 사건이며, 그 얼마 후에 있을 예수 자신의 부활 사건인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부활은 부활의 실체를 인류에게 보여주신 계시인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님 한 개인의 부활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시고 정복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망이 더 이상 이 땅에서 권세를 휘두를 수 없음을 여실히 증명하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성도에게 사망은 더 이상 왕 노릇할 수 없습니다.
성도 안에 있는 예수님께서 사망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우리들을 다시 살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로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이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못 고칠 병이나 고쳐 주고 죽음을 저지하여 이 땅에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생명의 본체이신 하나님으로서 모든 인간의 믿음과 경배의 대상이시며,
인간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그 부활의 생명을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본절 하반절과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보장된 영생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죽음은 육체적 죽음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믿기만 하면 비록 육체적으로 죽는다 할지라도 영적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비록 육체는 죽어서 소멸될지라도 이것은 멸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적 몸을 벗고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며, 마지막 때에 부활을 얻게 된다는 영광스러운 선언인 것입니다.
이 말씀에 관해 버클리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약속을 받고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해지는 쪽을 향하여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해가 뜨는 쪽을 향해서 여행하는 자들이다”하였고
신학자 메리 웹은 “수많은 사람들이 절망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는 죽음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지평선상의 한 문에 불과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이 되시기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운 존재가 아니며 절망의 어두움도 아닌, 새로운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천국에서 예수님을 만날 기대하는 마음으로 천성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런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영생하는 길도 있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과 함께 하는 삶’ 을 의미합니다.
영생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육체적 생명이 다하여 육신이 죽어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서 살다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 신령한 몸을 입어 영화로운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아가는 길이 있고, 또 다른 경우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면 육체적 죽음을 보지 않고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어느 길을 원하십니까? 저는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죽는 경험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도님들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다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항상 기도하며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3.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영생을 가지므로 육적인 죽음이라는 것이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영생과 믿음과의 관계에 대하여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곧이어서 마르다의 통찰력과 믿음을 독려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네가 믿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마르다가 믿음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르다가 가진 믿음이 자신이 예수님을 이해할 수 있는 만큼의 좁은 범위 안에서의 믿음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보다 큰 믿음으로의 진보를 요구하신 것입니다.
마르다는 비록 믿음이 있었으나 깊은 믿음이 없었던 것입니다.
믿음의 분명한 실체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마르다와 같은 모습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뢰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제2위 하나님 이시므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판단과 결정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믿음은 내가 원하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체의 것들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와 오늘의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믿음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것은 진실한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리스도 중심이며,
예수님과 관련된 것들을 무조건 전폭적으로 수용할 때에 믿음이 있음을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의 육체적인 죽음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기 위한 한 과정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죽음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되어 천국의 삶을 살기 위한 과정이고 휴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영생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죽음이 없다는 뜻입니다.
육체적으로 죽어도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되지 않으니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예수님은 선포하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진리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네가 믿느냐?" 고 물으시자 마르다는 이 진리를 깨닫고 “내가 믿나이다"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도 구주 되신 그리스도의 생명 권능과 그 언약을 믿으므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부터 영원까지 죽음을 보지 않고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고자 오셨지만 그 목적은 그 가족들에게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고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생명의 근원이심을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저희들도 예수님의 권능과 언약을 믿을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주님에게 기도하여 무엇을 원하기에 앞서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믿으면 이 땅의 삶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린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길을 가도록 제시하고 인도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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