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06-108 주의 의로운 규례를 지키기로 맹세하고 굳게 정하였나이다
나의 고난이 막심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 입의 낙헌제를 받으시고 주의 규례로 나를 가르치소서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이 도리이나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땅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극심한 고난과 많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하나님에게 다시
돌아와 회개하고 말씀에 순복하면 다시금 소성케 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새벽에도 저희들의 감사의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순복하겠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415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요한복음 11장30-32절.
1. 예수님은 우리가 진심으로 은혜를 사모하기를 원하십니다.
30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조문하기 위해 오셨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상가로 가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먼저 마중 나온 마르다와 만나 대화하신 예수님은 마르다가 집으로 돌아가서
마리아에게 말하고 마리아가 다시 예수님께 나아올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시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것은 마리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곳은 아마도 마을 입구였을 것이고, 손님을 마중하고 배웅할 수 있는
거리였으니 그리 멀지 않았을 것인 데도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오기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통해 보면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는 마르다가 전한 말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상가에 들어가시지 않고 마리아를 마을 입구까지 굳이 불러 내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상가에는 들어가실 이유가 없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조문객들과 별도로 그 마리아를 만나려 하셨으며,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암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는 마리아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암시하시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깨달을 수 있는 영적인 의미는 마리아가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의 마음을
회개하고 예수님께 나와 그 은혜를 간구하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마리아처럼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언제든지 담대히 나아 오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가 예수님에게 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으로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시고, 우리와 함께 대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크신 사랑으로 베풀어 주시어
아픔과 상처를 입은 성도에게는 치유와 회복을 주시고, 마음이 상한 성도에게는 위로해 주시고, 낙심하고 좌절한 성도에게는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복과 은혜, 즉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으로 채워 주시길 원하십니다.
2. 예수님과의 만남에 장애요인이 있다면 그것을 극복합시다.
31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려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언니 마르다의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마리아가 곡하러 무덤에 가는 것으로 알고 조문객으로 와 있던 유대인들도
그녀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애도하기 위해 무덤에 가는 것은 당시의 관습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신이 무덤에 안치된 후의 일주일 간은
특히 여성들은 죽은 자를 그리워하여 시간이 나는 대로 무덤에 가서 우는 것이 관습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곡하기 위하여 무덤으로 간다고 오해하고
따라온 그들의 행동을 잘못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 중에는 직업적으로 돈을 받고 호곡하러 온 자들도 있고, 사랑하는 이를 잃고 비탄에 잠겼던 경험을 가진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마리아를 돕고자 이렇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뒤를 따르는 유대인들로 인하여 마리아는 조용한 가운데서
예수님과 길게 대화할 수 없었습니다.
마르다는 조용한 가운데 예수님과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반면에
마리아는 이러한 기회를 가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마르다의 개인적인 대화는 22-27절까지 여섯 절에 걸쳐 기록된 반면
마리아와의 대화는 단지 32절 한 절에 그친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의 만남에 있어 불신자들에게 방해를 받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간혹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는 이유로 주일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경우를 봅니다.
저 또한 예전에 믿음이 약한 형님 가족이 동생이 있는 포항에 와서 하룻밤자고 놀기 위해 토요일에 집에 찾아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저를 만나고 함께 포항 관광을 위해 찾아오는
형님을 오지마라고 할 수도 없고, 형님 가족을 집에 두고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도 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난감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형님 가족이 오신 것은 너무 기쁘고 반가운 일이지만
하나님에게 예배 드리는 것을 멈출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동생이 다니는 교회에 가서 목사님의 설교를 한번 들어 보시라고 권하여 형님 가족을 모시고 함께 교회를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로 형님은 주일날 방문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과의 만남에 장애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로인하여 예수님과의 만남에 지장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와 같이 예수님께 함께 오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실 마리아를 따라온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를 살리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누구라도 예수님에게 데려와야 합니다.
이 본문에서 또 한가지 더 살펴보면
곡한다는 뜻은 ‘울부짖다’, ‘비탄 해하다’ 라는 좀더 강한 의미로 번역됩니다.
성도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과의 죽음과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으면 영원한 불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슬퍼하고 애통해 하고 비탄 해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천국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성도의 죽음은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사는 출발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기쁨으로 환송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죽은 자를 위한 애도가 교회 안에서는 이상하고 옳지 않은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금기시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더 이상 만날 수도 없고 대화하거나 포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 슬픈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죽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잠시동안의 이별을 슬퍼해야 할 것입니다.
3. 주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이십니다.
32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마르다로부터 전갈을 받은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 슬픈 심정을 토로하는 장면입니다.
31절에 보면 마리아를 위로하던 조문객들이 마리아가 급히 나가는 것을 보고
무덤에 가 통곡하려는 것인 줄 알고 뒤따랐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오직 주님을 뵙고
자신의 슬픈 심정을 예수님께 아룀으로 위로 받기 위해 내달렸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부른 이상 이제 조문객들의 위로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참 위로의 근원이 되심을 그녀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이처럼 슬픈 일을 당할 때 사람들에게 위안받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위로를 바라야 합니다.
사람들의 위로는 진정으로 위안이 되지 못하고 슬픈 상처를 온전히 치유해 주지 못합니다.
그것은 지극히 형식적이며 말뿐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못합니다.
아무리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위로해 준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우리가 어떤 불행을 당해도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분이 우리 주님 이십니다. 앞의 25절에서 주님은 슬퍼 하는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도 능히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심으로 그녀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 놓으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말로만 위로해 주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실제로 성도를 슬프게 만든 불행의 원인을 제거해 주어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 때문에 슬퍼하는 두 자매에게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심으로 위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언제 슬퍼합니까? 불행을 만날 때 슬퍼합니다.
그 불행의 원인들 가운데서도 죽음은 우리를 가장 슬프게 만드는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가까운 사람, 부모, 형제, 자녀, 배우자, 친구 등의 죽음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을 안겨줍니다.
또 여러가지 문제들을 만나는 가운데 지치고 삶에 대한 희망이 없어지기에 슬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영생 천국과 이웃을 사랑하는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어떤 불행을 당해도 천국 소망과 이웃 사랑의 진리만 굳게 믿는다면
절망과 슬픔을 이기고 희망과 기쁨 속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불행을 당했을 때
주님을 찾아야 할 이유는 이 소망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재확인받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영원한 언약을 재확인 받으면 어떤 불행도, 슬픔도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픈 일을 당했을 때 먼저 주님을 찾아 그 아래 엎드려 사정을 낱낱이 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세상 불행을 이길 수 있는 길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진심을 다하여 예수님을 찾아가고
예수님을 만나는데 어떠한 장애 요인이 있다 하여도 그것을 지혜롭게 극복하여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재목을 아뢰고 슬픈 마음을 위로 받는
그래서 항상 마음의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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