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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20:23~27)주의자녀 세상의자녀

119:165~168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그들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바라며 주의 계명들을 행하였나이다

내 영혼이 주의 증거들을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히 사랑하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들과 증거들을 지켰사오니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음이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자에게 평안을 주시고, 인생 여정에 걸림돌이 없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설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환란과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여 살면, 성령께서 붙들어 주시고, 도와주시니 저희들은 결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나의 모든 행위가 주 앞에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주의 말씀의 법도와 증거를 지키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133장 어저께나 오늘이나, 2023~27.

1. 주의 자녀와 세상 자녀가 구분됩니다.

23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거 중세 가톨릭이 이 말씀을 악용하여 면죄부를 팔고 교황을 신격화하였습니다.

인간은 누구도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거나 정죄할 자격도 없으며, 권한도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도 용서받은 죄인에 불과하며,

성직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한 영혼을 전도하여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선언할 권리가 교회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은 위대한 특권입니다.

우리는 이 특권을 충분히 활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권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만약 이것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직무 유기에 대한 책망을 면할 수 없게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두 가지 대조적인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사람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아 구원을 얻고, 또 한 사람은 믿지 않아 정죄를 받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서는 구원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나눠집니다.

복음이 전파되기 전에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또 누가 세상 자녀인지 구분이 분명치 않으나

복음이 전파되면 명확히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도 우리 주변에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찾아내어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곡식은 늦기 전에 서둘러 거두어 들이라고 하십니다.

만약 그대로 방치하여 추수할 시기를 놓치면 손실이 크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전도가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악한 세대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숨은 영혼, 잃어버린 영혼이 곳곳에 있기 마련입니다.

전도가 힘들다고 어렵다고 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엄청난 특권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교회 주변에 금은보화가 숨겨져 있고 그것을 찾는 사람이 주인이라면, 성도들은 온 교회 주변을 샅샅이 찾아다닐 것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보화를 찾는 일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면 이 세상의 어떤 보석들보다도 고귀한 영혼들이 구원을 얻기 때문에

복음 전도는 가장 귀한 보물을 찾는 것과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면 할수록 이 세상에 숨겨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보석들을 여기저기서 발견되며, 이것은 하나님께 큰 기쁨이 되고 우리는 큰 상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두려움에서 헤어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없었습니다. 오직 슬픔만이 그들을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되었습니까? 기쁨이 그들의 마음을 지배했습니다. 평강이 그들의 심령에서 넘쳐 흘렀습니다. 이렇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인생과 그렇지 못한 인생 사이에는 엄청난 삶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간절히 찾고 사모하는 자에게 나타나 주십니다.

그들 마음에 찾아와 주십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습니까?

그래서 마음에 평강이 흘러 넘치고 기쁨이 늘 샘솟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부활의 주님을 만나셨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주님을 전하여 보화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인간적 회의도 신앙이 성장하는 데에 필요한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24. 25절에서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자신이 직접 예수를 보고 만져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에 도마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도마가 어디에 있었으며 또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도마가 다른 제자들과 함께하지 않고, 공동체에서 이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으로 다른 제자들처럼 도마 역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예수의 제자로서 계속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 때문에 제자의 직분을 버리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도마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자 숨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 예수의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동료 제자들이 한결같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니 그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고

자신도 직접 예수님을 만나 보고 싶어서 예수 부활을 받아드리지 않으려 한 것입니다.

그것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보기 위한 도마의 간절한 소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도마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제자들의 말에 회의적 태도를 보인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부활하신 예수를 보기 전의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부활을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만나 보기 전에는 믿을 수 없다고 해서

도마를 나쁘게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다른 두 제자들도 예수의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전하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메시지를 들었지만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고 믿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불신은 제자들 모두가 가지고 있던 공통점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부활에 대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 누구도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적이 없었기에, 그것도 무덤 속에 3일이나

있다가 다시 살아난 적은 더더욱 없으므로 도마와 똑같이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도마의 태도를 지나치게 혹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도마의 태도는 오히려 부활의 주를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램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또한 이런 인간적인 회의가 신앙을 바르게 성장시키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든지 무조건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지만

맹목적인 믿음은 상당한 위험이 따릅니다. 잘못하면 이단이나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누가 죽어서 천국을 갔다 왔다든지, 신기한 이적을 말한다든지 이런 개인적인 체험이나 능력의 역사가 하나님에게서 난 것인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며,

도마가 보인 태도는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긍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영을 다 믿는다고 믿음이 아니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인다고

믿음 좋은 성도는 아닙니다. 분별은 언제나 필요하며 또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말씀에 대해서는 의심없이 받아들이되

사람들의 말에 대해서는 그 말의 진위 여부를 늘 분별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3. 주께서는 언제든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찾아오십니다.

26, 27절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두번째로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것이 나옵니다.

그 자리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으며 예수님은 도마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도마의 말을 들으셨고 그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는 주께서 계시지 않을 때에

제자들에게 말했음에도 예수님은 도마가 말하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든지 예수님이 모두 들으신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이 두번째 나타나심은 예수님이 언제든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신다는 중요한 사실도 일깨워 줍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를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믿음 없음을 책망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로하여금 믿음을 가지게 하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처음부터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자신의 도움 없이는

결단코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죄인들을 위해서였으며, 오늘도 자기를 찾는 모든 이들을 위해서

언제나 어느 곳이든 찾아오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은 다 만나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고 아주 가까이에 계십니다.

도마의 회의적인 반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아

불쾌하게 생각하고 비난했을지도 모르나 예수께서는 도마를 돕고자 찾아오신 것처럼,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약한 믿음을 견고케 하시려고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 약속을 확신하지 못하므로 전전긍긍할 때에도 예수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만 하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확신을 가지도록 역사하십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을 줄 뿐 아니라 도마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일에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비난받을 일을 한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불신자들처럼 그들을 비난하거나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위로하며 바로 설 수 있게 돕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남을 섬기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에게 요구되는 합당한 태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접받기를 좋아하고 다른 이들 위에 군림하는 것을 좋게여기나

우리는 예수께서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섬기는 생활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다면,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자를 찾아 내는 것이 금은 보화를 발견하는 것과 같은 기쁨이라고 하셨는데, 저희들도 그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간증할 때 다른 사람이 만난 예수를 간증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난 예수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도마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뵙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은 우리 마음의 소망을 아시고 우리를 찾아 오시어 만나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