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45,146 여호와여 내가 전심으로 부르짖었사오니 내게 응답하소서 내가 주의 율례를 지키리이다. 내가 주께 부르짖었사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증거를 지키리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오늘 이 새벽에도 진심으로 하나님에게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저희들에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겠습니다. 저희들을 이 모든 환란, 풍파에서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2장26-27절.
1. 골고다까지 주님과 동행하는 자가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26절을 보면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귀하게 여겨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며,
어디까지 따르며 섬겨야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실까요?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며 섬기는 모습만 보이면 모두 귀하게 여기며 사랑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본 절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항상 예수님과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으면
진정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 절의 말씀 가운데 ‘거기’란 어디를 가리킬까요?
그곳은 바로 골고다 십자가 언덕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이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골고다 언덕까지 동행하는 자가 아니면
예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자가 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그러한 자는 하나님의 사랑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16:24에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들은 이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내 자신을 말씀에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 소망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갈망하면서도
예수님을 섬기는 장소에는 함께 하지 않으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적을 일으키는 곳에 계시거나,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실 때에는
예수님을 섬기겠다는 열정을 보이지만, 예수님이 낮고 천한 자리에 계시거나,
고난과 고통의 골고다 언덕에 계실 때에는 함께하지 않으려 합니다.
심지어 베드로처럼 자기에게 불이익이 닥칠 것 같으면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은 받기를 원하는 것은 염치없는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께 귀하게 여김을 받고 큰 사랑을 받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따르며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상관하지 않고 늘 함께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너는 내 아들 예수와 어디까지 동행하였느냐?" 고 물으실 때에
“예 주님, 골고다 언덕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저도 저의 십자가를 졌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 저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그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최소한 십자가의 예수님을 외면하지 않고, 예수님과 동행하려고 애쓰고 힘쓰는
노력이라도 하려하고 또, 그렇게 할 수 없는 자신을 향해 회개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고 힘과 지혜와 용기를 부어 주시고
성령충만함을 더하여 주시어 감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는 칭찬과 함께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성숙한 성도란 거룩한 고통을 누구보다 크게 느끼는 자입니다.
27절은 예수님이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민망하다’ 라는 말은 ‘흔들리다’ 혹은 ‘동요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 절을 “내가 지금 이렇게 마음을 걷잡을 수 없으니”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져야하는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인간적인 모습을 본 어떤 이는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초연하고 의연한 모습으로 지시지 않고, 이처럼 큰 고통을 느끼며 흔들리고 계시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죽음 앞에서도 의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고대 헬라의 대표적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기 전에도 “나는 이제 영혼의 감옥을 떠나간다” 라고 말하며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제자들과 친구들을 위로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육신 같은 사람들도 단종을 향한 충성의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모진 고문을 다 받으며 죽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 앞에서 이러한 두려움과 고통을 드러내셨던 예수님이
소크라테스나 사육신 보다도 인격적으로 덜 성숙하셨다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그리고 죄의 삯인 사망에 대해,
대속의 십자가의 본질에 대해 깊이 아셨기에 그렇게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감당하셔야 할 십자가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일’ 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를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아시기에 이처럼 마음의 동요를 크게 일으키며 슬퍼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는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인간은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 구덩이 속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심판이 없이 천국으로 들어가지만 우리 주변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심판 받고 불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편이 잠 들 수 없습니다.
만약 내 사랑하는 부모가 내 형제가 내 자녀가 지옥으로 떨어진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내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 이상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일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이 새벽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그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통곡하며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아 주시어 그 영혼을 마귀에게서 건져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앙의 성숙으로 내 자신의 아픔과 고통은 잊되
불신자들을 향한 더욱 크고 깊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고난과 시련이 없다고 만족하지 말고,
예수님과 사도 바울처럼 죄악으로 인해 죽음의 지옥으로 달려가는 세상사람을 바라보며
큰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 피땀어린 기도를 할 수 있는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신앙이란 매일 새로운 결단을 하는 것입니다.
다시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때에 왔나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이 가져올 두려움과 공포로 인해 망설이는 듯한 모습과 흔들리는 모습을 잠시 보이셨지만 이내 메시야로서의 사명과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시며 십자가를 위한 결단을 새롭게 하심으로써 신앙적 승리를 거두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예수님의 고뇌와 신 앙적 결단을 통한 승리의 과정을 보면서 진정한 신앙이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 가운데에는 신앙의 과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성숙한 신앙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다소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신앙적 회개와 결단이란 일생의 결정적 순간에 단 일회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중대한 회개와 결단을 거쳐 신앙의 과정에 들어선 사람에게는 더 이상의 결단과 회개가 필요하지 않으며 만일 그러한 결단이나 회개를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신앙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있어 시험과 고난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매순간 그러한 고비를 거칠 때마다 흔들리기도 하며 쓰러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 성숙한 신앙이란 어느 한 순간 완성되어 그 이후의 일생 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좌절과 고통, 그리고 그때마다 새롭게 이루어지는 기도와 결단 등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욥만해도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도 자랑할 만큼 순전한 신앙인이었지만
인생의 최대 고난이 오자 흔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음성을 듣자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결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노라고 결심해도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선뜻 하나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겠다고 큰소리친 베드로가 결정적인 순간에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며 실족했던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코 우리의 신앙에 대해 자만하거나 교만하지 않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이 연약하여 자주 흔들리고 넘어지는 이웃에게도 정죄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만 우리 모두는 끊임없는 시련과 연단을 통해 성숙해 가는 과정적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시험에 빠졌을 때는 지체없이 회개하며, 결정적 순간이 다가올 때는 신앙적 결단을 새롭게 함으로 나날이 성숙한 신앙으로 완성되어 나가는 정금 같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예수님께 끝까지 동행하며 섬기어 하나님의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주변의 불신자들을 향한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중보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우리의 신앙에 자만하지 말고 결정적 순간에 신앙적 결단을 하여 나날이 성숙하고 성화되어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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