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29-130 주의 증거가 기이하므로 내 영혼이 이를 지키나이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
아무리 우둔한 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께서 조명하여 주시면 어려운 말씀도 쉽게
이해되고 반대로 아무리 세상적으로 뛰어난 학박사라 하더라도 성령께서 풀이해주시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는 우둔자가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에게 믿음을 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깨달아지고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교훈이 신비하고도 놀라워 저희가 마음을 다해 지키려고 애씁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은혜의 말씀을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순종하겠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요한복음 12장12-16절.
1.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먼저 세상과 영합하려는 마음부터 버려야 합니다.
12,13절은 예루살렘으로 입성을 하시는 예수님을 맞으러 나온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쳤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호하며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군중들의 환호에 대해 예수님께서 어떠한 모습을 보이셨는지 살펴보고
오늘 우리들이 받은 사명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면 명절에 큰 무리가 예수님을 영접하기 위해 나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명절이란 이스라엘의 3대 절기 가운데 하나인 유월절을 말합니다.
그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인 유대인들의 수는 약 2백70만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을 맞으러 나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맞기 위해 나온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13절을 보면 이처럼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이스라엘의 왕이여”라고 외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군중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의미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예수님을 자신들을 죄에서 구원할 메시야가 아니라
단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할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모든 병자를 고칠 뿐만 아니라 죽은 나사로까지 살리셨고
구약의 만나와 메추라기의 이적에 버금가는 오병이어의 이적을 일으키셨고
구약의 홍해를 가르는 기적만큼 놀라운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꾸짖어 바다를 잠잠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물리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듯이 예수님의 능력으로 로마도 충분히 이기고도 남으며 자기들을 구원해 주실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야로 생각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하고 있을 때 이것을 지켜보는 이스라엘 본분왕이나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어떤 마음일까요? 시기와 질투심이 하늘을 찌를 듯 하였을 것이고 로마의 황제에게 부여 받은 자신의 권력이나 기득권을 빼앗길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에수님을 죽이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모습을 보이셨습니까?
사람들의 환호에 들떠 세상의 권력자들처럼 화려한 병거나 준마를 타고 오시지도 않으셨고,
‘내가 너희를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니 나만 믿어라’고 큰소리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반대로 가장 약하고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고,
끝까지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으셨으며,
인간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진정한 메시야의 길이고,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올바로 이루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환호와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겸손하고 낮아진 모습으로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성도들은 교회가 성장하려면 세상의 안목처럼 화려한 교회 건물이 있어야 하고, 목사님의 설교도 선지자적인 책망이나 죄를 깨우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보다는
죄로 인한 고난에 대해 위로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물질적 복과 은혜의 말씀만 들으려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하나님의 눈치를 보지 않고 성도의 눈치나 보고
하나님이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보다 성도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씀을 전하여
성도들에게 인기나 끌려고 하고, 시류를 따라 사조에 영합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하나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따르고, 신본주의가 아니라 인본주의를 따른다면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촛대를 옮기신다고 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그 어떤 세상의 압력이나 잘못되고 왜곡된 기대가 거세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흔들리지 않고 나아가려는 견고한 믿음과 확고한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세상적으로 볼 때는 잠시 실패한 것 같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영원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롭고도 견고한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스스로 낮추는 자가 되어야합니다.
14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한 어린 나귀를 끌고 와서 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말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겸손한 주님의 모습에 감동도 없고 깨달음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이나,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해 본다면
오늘 우리는 큰 도전을 받고 충격을 받아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개선하는 장군이나 왕은 성에 입성할 때 그 뒤에는 포로와 전리품이 뒤따르고
화려한 병거나 준마를 타고 자기의 권세를 자랑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수많은 백성들이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를 흔들며 환호할 것을 예상한다면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화려한 병거나 준마를 타고 입성하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솔로몬 왕도 자신이 타고 다니는 가마에 각종 금은과 레바논 나무로 화려하게 꾸미어 타고 다녔는데 만 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그런 화려한 수레나 가마는
소사하고 아직 아무 짐도 실어보지 않은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등장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메시야로 추앙 받으시면서도 한 성인 남자의 무게도
이기지 못해 뒤뚱거리는 모습으로 걸을 수밖에 없는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오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미 오래 전에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이스라엘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리라고 예언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예언과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추시며 나귀 새끼를 타고 겸손한 모습으로 입성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백퍼센트 완전하게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완벽하게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연히 엄청난 축복을 받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가장 좋은 집에 살고 가장 좋은 차를 타고 다니고
궁궐과 같은 호화로운 성전을 건축하고, 자랑하듯 다니는 모습을
어린 나귀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보신다면 무엇이라 할까요?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오늘 우리는 사람들 앞에 높아지려는 마음을 버리고
더 낮아지고 겸손하여 섬기는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백 퍼센트 순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부단한 노력을 기우려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받고 칭찬받는 무늬만 성도가 아닌 진정한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3. 성도는 성경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평생 배우고 힘써야 합니다.
16절을 보면 제자들은 처음에는 스가랴서에 예언된 말씀과 예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고난을 당하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어 진리를 깨우쳐 주신 후에야
이 모든 말씀과 사건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제자들의 뒤늦은 깨달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단지 그들이 지혜가 부족하고 아둔한 까닭이라고 쉽게 단정지어야 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3년간이나 주님과 동행하며 친히 말씀을 듣고 이적을 목격했던 제자들조차도
이처럼 진리를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더구나 성령의 조명과 도우심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생각한다며 오히려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씀 속에 감추어진 비밀과 진리가 얼마나 깨닫기 힘든가를 말해 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매년 일독했다고 하나님을 다 알 수 없습니다.
똑 같은 말씀, 다 아는 말씀 읽어서 무엇 하나? 하고 잘못된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는 두 번 이상 보지 않습니다. 내용을 다 알고 있기 때문에
흥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똑 같은 내용이라도 나의 상황과 처지에 따라
어제 깨닫지 못한 말씀을 오늘 깨닫기도 하고, 전에 알던 말씀이지만 오늘 읽으면 새롭게 다가오기도 하고, 전에 별 뜻없이 그냥 넘어간 말씀도 오늘은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꼭 필요한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성경은 무려 1500년 이상이나 걸쳐 다 다른 저자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통해 기록했습니다.
시대가 다르고 상황이 다르고 사람들도 다 다르고 무수한 왕조의 흥망성쇠와
수많은 인생의 탄생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각 개인의 역사가 기록되어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의 우주 만물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번 스쳐 지나가듯 읽고 다 깨달었다 할 수 있습니까?
죄와 혈육을 지닌 피조물이 삼위일체와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쉽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기억하며 언제나 말씀 앞에서 겸손함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반대로 지금 당장 말씀을 이해할 수 없다고 낙심해서도 안 되겠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며 곁에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 조차도 즉석에서 말씀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말씀 앞에서 교만도, 낙심도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의 진리와 신비를 깨닫기 위해 평생 배우고 힘쓰는, 그래서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 가운데 말씀의 깊은 의미를 깨달아 그리스도의 거룩한 빛을 발하는 성숙한 성도로 성화하도록 노력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을 본받아 사람이 좋아하는 대로가 아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대로 행하고
사람에게 높아지고 높임을 받으려 하지 말고 겸손히 낮아져서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늘 가까이하고 성령에 의지하여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은 말씀을 따르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요한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12:23-24)신령한 눈을 뜨면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0) | 2022.04.06 |
---|---|
(요12:18-22)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0) | 2022.04.06 |
(요12:7-10)하나님은 성도의 작은 헌신을 큰 영광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0) | 2022.04.06 |
진정한 예배는 세상을 향기롭게 합니다. (0) | 2022.04.06 |
우리도 장차 주님과 함께 천국 식탁에 앉게 될 것입니다. (0) | 2022.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