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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2:18-22)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119:139-140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 원수들이 주의 말씀을 무시하니 내 분노가 불처럼 타오릅니다.

주의 약속은 확실하므로 내가 이것을 사랑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요한복음 1218-22.

 

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18절을 보면  “이 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 러라”고 하였습니 다.  여기서  ‘이  표적’ 이란 17절에  기록된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무리들은 예수께서 죽 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적을 그분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결정적 표적으로 생각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열렬하 게  환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가운데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던 수많은    무리에  대해 사도 요한이  이러한 설명을 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이후 예수께서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실  때에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으니  저를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 19:6 12) 다름아닌  바로 이들,    주님 을  향해  ‘이 스라엘의  왕’ 이라 고  불렀던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 다.  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  그래서 그 중심 에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이처럼 아침 안개와  같이, 모래 위에 세운 누각과 같이  상황이  바뀌면    사라지 고  만다는 것입니다.  즉 나사로의  이적과 오 병이어의 기적만을  생각하며  주님 에게 종려 나무  가지 를  흔들던  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주님 을  향해서는 조롱과 비웃음의  손가락질 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 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 앙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과 연  나의  신앙은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는가, 과연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 을 모시고  있는가 를 진지하게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 다.  그리하 여  나의  마음속에  진정한  십자가가 새겨져 있지 않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 며  주님  앞에 엎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 라 이러한 관점 에서 우리들의 교 회도 다시  한번  둘러보아야 하겠습니 다.  우 리의 교회는  과연  십자가 위에 올바로 서  있 는지  아니 면  복음을  닮은  세상의  사상과 철

학에 기초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살피고  점검해  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가운데에는 단지  교회의  자리가    차면 그 자체가 축복이요 성장이라고  오해하며 만

족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신앙과 같이 교회 역시 십자가 위

    있지  않다면  아무리  외형이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여도  또 그  안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할지 라도 이들 모두는 실상 모래 위에 세운 누각과 같이  언젠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과거에  십자가  없는 헛된 믿 음으로 종려나무 가지 를 흔들던 유대  백성들 의  외침과 같지  않은지  진지하게 살피 고  반 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십자가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그 몸에 십자가 의  흔적을 지닌,  그리하여 사상 누각이  아니 라 이  시대에 진정한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 출    있는 진리의 기퉁과  (덤전 3 15)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는  세상적  관점을  가지 고  환호하는  유대의 무리들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 하시고예언된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셨습니 다.  그리 고  마치 잡혀 가는 사람이 흔적을 남겨 자신 을 찾도록 만들듯이  주님 께서는 이러한 겸손 한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을  찾 고  따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역시 모든  인간적 인  교만한 마음을 버리 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 고  겸손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이  원하시 는  모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충성스런 하나 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 다.

 

복음에는 영흔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20.21절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는데 저희가 빌 립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청한 사실 이  나옵니다.  여기서  ‘헬라인’ 이란 당시  헬 라파  유대인들,    양친    한쪽이  헬라인이 거나 아니 면  헬라 지역에 오래 거주한  탓에 헬라어를 말하게 된  유대인들이  아니 라 혈통 적으로  순수한  이방 헬라인들을  가리겁니 다.  이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이방인들(proselytes)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대교를 신봉하여  유월절 준수를 위해 예루살렘까지  왔던  이들이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유대교를 근본부 터  뒤흔드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혔던 주님을 찾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더구나  당시 는  이러한 주님을  체포하여 처형하려는 살별 한 분위 기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고 따라 서  이러한 분위 기를 갑지 하고 있던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만나기를 꺼려하고  있던 시점이 아닙 니까( 9:22)?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여러분,    사람들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순수한 헬라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헬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많은 철학과 신화,  종교에 익숙했던 사 람들일  것입니다.  하지 만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유는  아마 사변적이고 메마른  헬라 철학과 종교로부터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했 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나사로의 부활에  대 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 다( 12:11).  뿐 만 아니 라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 던  겸손한  주님 의  모습도  보았습니 다( 19:35-38)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헬 라의  생명력 없는 철학과  죽은 종교에  염증 을  느낀  이들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기적 소식과  함께  이처럼 기적을 일으킨  주님 이 교만하기는커녕  반대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감동이 얼

마나  컸겠습니까? 따라서  이처럼 신선한 충 격과 감동을 받았을 이들이 주님을  찾지  않 은  것이 오히 려  이상한  일이 아니 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이겠습니 까?

그렇습니 다.  이처럼 복음의  생명력과 진리 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겸손은 사람들의 영 혼을  이끄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 면  진정한  영생의 복음과  사랑의  말씀에는

  땅의 것들로부터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영흔들을 이끄는  흡인력 (magnetic power)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석 이  금속 조각 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말입 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 가  성장하지  않는 탓을 단지 성경 말씀

  낡았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지  마십 시오. 왜냐하면 진정 낡은  것은 복음이  아니 라  그 복음의   생명력을 증거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구태 의연한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라도 복음이

지니는 진정한  생명력과 사랑,  겸손의   힘을 회복하며 증거하도록 힘써 보십시오.  그리하    세상의  헛된 쾌락과  영화에  만족하지  못한 수많은 영흔들이 이들 헬라인들처 럼  복음 의  생명력과 진리에 이끌려  오늘도  주님 을 찾아 수없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연합할 때 천국은 더  아름답게 확장됩니다.

21절과 22절에는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인 들을 주님 에게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이 복음서 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이 주 님을 찾은  목적 이  무엇이었는지, 또    직접 주님을  찾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만나려  했 는지 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반면    절 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 다는  점입니다.

  먼저 21절을 보면  주님 을  찾아온  헬라 인들은 우선 빌립에게 접근하여  자기들의 의 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 다.  이는 아마  빌립 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이라는  점, 그리 고  그의 출신 지역인 갈릴리  뱃새다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으므로 그가 헬라어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던    같습니 다.   또 한  이로써  보건대 주님 을  법기 원했던 헬라인들은  매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무지 막지 한 사람들이  아니 라  절차를  중요시 하는 매우 교양  있고 정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함께 추측해  볼 수 있습니 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이러한 이방인들의 청을 받은 빌립은 단독으로 결정하여  행동하 지  않고  안드레에게 가서  상의를  하고  있습 니다.  이는 아마 당시  분위 기가 주님 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 라  헬라인들은 이방인이었으므로 이들의  낯선  방문에  대한 처리에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빌립은 함께  팀을 이루어  사역 하였던  안드레 ( 6:5-8)와 깊은 상의를      주님께  이방인 의  방문을 말씀드림으로써  당면  과제를 해결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사도 들이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는 아름다운 모습 을 볼 수  있습니 다.

그렇습니 다.  이처럼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함께  상의하여  가장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시절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전통이었 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할례와  같은  전통적 인  의식과 충돌하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초대 교회 는  이에 대해    누가 독단적으로 일어 나 방향을 결정한  것이 아닙 니다.  즉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느 누가 자기의  은사와 권위 를  내세우며  일방적인 주장을 한  것이 아니 라  공회를  소집 하여  가장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과 의 견  조정을  거쳐 가장  올바른 하나님 의  뜻을 찾아  이방 지역에 전함으로써  복음이  더욱 편만하게  전파되 도록  하였습니다(  15:1 35).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교회  안팎의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만을  독단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 라 이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 야 하겠습니다.  그리 하여 하나님 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와 경험,지식들이  모여  하나가 되어 연합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아름답게 확장되도록 해야 하겠 습니다.    그러 할  때만이  하나님 의  나라는 가장 효과적으로 확장될    있습니 다.  왜냐 하면 하나님 은 모든 성도와 교회 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 라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 도록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 니다( 4:1112).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