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39-140 내 대적이 주의 말씀을 잊어버렸으므로 내 열성이 나를 소멸하였나이다
주의 말씀이 심히 정미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내 원수들이 주의 말씀을 무시하니 내 분노가 불처럼 타오릅니다.
주의 약속은 확실하므로 내가 이것을 사랑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35장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요한복음 12장18-22절.
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은 아침 안개와 같을 뿐입니다.
18절을 보면 “이 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 러라”고 하였습니 다. 여기서 ‘이 표적’ 이란 17절에 기록된 예수께서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의미합니다. 즉 무리들은 예수께서 죽 었던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이적을 그분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결정적 표적으로 생각하고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자 열렬하 게 환호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승리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 가운데 예수를 열렬히 환영했던 수많은 이 무리에 대해 사도 요한이 이러한 설명을 더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의미 심장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은 이후 예수께서 체포되어 빌라도에게 재판받으실 때에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으니 저를 못박으라고 소리쳤던 사람들이 (요 19:6, 12) 다름아닌 바로 이들, 즉 주님 을 향해 ‘이 스라엘의 왕’ 이라 고 불렀던 이 사람들이라고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 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 다. 십자가에 기초하지 않은 신앙, 그래서 그 중심 에 십자가가 없는 신앙은 이처럼 아침 안개와 같이, 모래 위에 세운 누각과 같이 상황이 바뀌면 쉬 사라지 고 만다는 것입니다. 즉 나사로의 이적과 오 병이어의 기적만을 생각하며 주님 에게 종려 나무 가지 를 흔들던 자들이 십자가에 달린 주님 을 향해서는 조롱과 비웃음의 손가락질 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사 실을 깊이 생각하면서 먼저 우리 자신의 신 앙을 되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과 연 나의 신앙은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는가, 과연 중심에 십자가의 주님 을 모시고 있는가 를 진지하게 살펴 보아야 하겠습니 다. 그리하 여 나의 마음속에 진정한 십자가가 새겨져 있지 않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회개하 며 주님 앞에 엎드리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 라 이러한 관점 에서 우리들의 교 회도 다시 한번 둘러보아야 하겠습니 다. 우 리의 교회는 과연 십자가 위에 올바로 서 있 는지 아니 면 복음을 닮은 세상의 사상과 철
학에 기초하고 있는지 심각하게 살피고 점검해 보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도
들 가운데에는 단지 교회의 자리가 꽉 차면 그 자체가 축복이요 성장이라고 오해하며 만
족하는 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신앙과 같이 교회 역시 십자가 위
에 서 있지 않다면 아무리 외형이 화려하고 그럴듯해 보여도 또 그 안을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채우고 있다 할지 라도 이들 모두는 실상 모래 위에 세운 누각과 같이 언젠가는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오늘 우리가 드리는 기도와 찬양이 과거에 십자가 없는 헛된 믿 음으로 종려나무 가지 를 흔들던 유대 백성들 의 외침과 같지 않은지 진지하게 살피 고 반 성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올바른 십자가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그 몸에 십자가 의 흔적을 지닌, 그리하여 사상 누각이 아니 라 이 시대에 진정한 구원과 생명의 빛을 비 출 수 있는 진리의 기퉁과 터(덤전 3 ‘ 15)가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주님께서 는 세상적 관점을 가지 고 환호하는 유대의 무리들 속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아니 하시고예언된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셨습니 다. 그리 고 마치 잡혀 가는 사람이 흔적을 남겨 자신 을 찾도록 만들듯이 주님 께서는 이러한 겸손 한 모습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을 찾 고 따르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우
리 역시 모든 인간적 인 교만한 마음을 버리 고 하나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낮추 고 겸손하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 이 원하시 는 모든 뜻을 이루어 드리는 충성스런 하나 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하겠습니 다.
복음에는 영흔을 이끄는 힘이 있습니다.
20.21절에 보면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었는데 저희가 빌 립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기를 간청한 사실 이 나옵니다. 여기서 ‘헬라인’ 이란 당시 헬 라파 유대인들, 즉 양친 중 한쪽이 헬라인이 거나 아니 면 헬라 지역에 오래 거주한 탓에 헬라어를 말하게 된 유대인들이 아니 라 혈통 적으로 순수한 이방 헬라인들을 가리겁니 다. 이들은 아마도 유대교로 개종한, 헬라 이방인들(proselytes)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유대교를 신봉하여 유월절 준수를 위해 예루살렘까지 왔던 이들이 당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 의해 유대교를 근본부 터 뒤흔드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혔던 주님을 찾은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더구나 당시 는 이러한 주님을 체포하여 처형하려는 살별 한 분위 기로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었고 따라 서 이러한 분위 기를 갑지 하고 있던 사람들은 주님과 직접 만나기를 꺼려하고 있던 시점이 아닙 니까(요 9:22)?
이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여러분, 이 사람들은 이미 아는 바와 같이 순수한 헬라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헬라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많은 철학과 신화, 종교에 익숙했던 사 람들일 것입니다. 하지 만 그들이 유대교로 개종한 이유는 아마 사변적이고 메마른 헬라 철학과 종교로부터 아무런 만족을 얻지 못했 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왔다가 나사로의 부활에 대 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 다(요 12:11). 뿐 만 아니 라 그들은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 던 겸손한 주님 의 모습도 보았습니 다(녹 19:35-38), 그렇다면 생각해 보십시오. 헬 라의 생명력 없는 철학과 죽은 종교에 염증 을 느낀 이들이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기적 소식과 함께 이처럼 기적을 일으킨 주님 이 교만하기는커녕 반대로 겸손하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시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 감동이 얼
마나 컸겠습니까? 따라서 이처럼 신선한 충 격과 감동을 받았을 이들이 주님을 찾지 않 은 것이 오히 려 이상한 일이 아니 겠습니까?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이겠습니 까?
그렇습니 다. 이처럼 복음의 생명력과 진리 에서 우러나오는 사랑과 겸손은 사람들의 영 혼을 이끄는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 면 진정한 영생의 복음과 사랑의 말씀에는
이 땅의 것들로부터 만족하지 못하는 모든 영흔들을 이끄는 흡인력 (magnetic power)
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석 이 금속 조각 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말입 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날 교회 가 성장하지 않는 탓을 단지 성경 말씀
이 낡았기 때문이 라고 생각하지 마십 시오. 왜냐하면 진정 낡은 것은 복음이 아니 라 그 복음의 생명력을 증거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구태 의연한 모습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부터 라도 복음이
지니는 진정한 생명력과 사랑, 겸손의 힘을 회복하며 증거하도록 힘써 보십시오. 그리하 면 세상의 헛된 쾌락과 영화에 만족하지 못한 수많은 영흔들이 이들 헬라인들처 럼 복음 의 생명력과 진리에 이끌려 오늘도 주님 을 찾아 수없이 교회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가 연합할 때 천국은 더 아름답게 확장됩니다.
21절과 22절에는 빌립과 안드레가 헬라인 들을 주님 에게 소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 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 있는 것은 이 복음서 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헬라인들이 주 님을 찾은 목적 이 무엇이었는지, 또 왜 직접 주님을 찾지 않고 제자들을 통해 만나려 했 는지 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는 반면 그 절 차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 다는 점입니다.
즉 먼저 21절을 보면 주님 을 찾아온 헬라 인들은 우선 빌립에게 접근하여 자기들의 의 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 다. 이는 아마 빌립 이라는 이름이 헬라식 이름이라는 점, 그리 고 그의 출신 지역인 갈릴리 뱃새다가 이방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으므로 그가 헬라어에 익숙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 다. 또 한 이로써 보건대 주님 을 법기 원했던 헬라인들은 매사를 자기들 마음대로 밀어붙이는
무지 막지 한 사람들이 아니 라 절차를 중요시 하는 매우 교양 있고 정중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함께 추측해 볼 수 있습니 다.
그런데 22절을 보면 이러한 이방인들의 청을 받은 빌립은 단독으로 결정하여 행동하 지 않고 안드레에게 가서 상의를 하고 있습 니다. 이는 아마 당시 분위 기가 주님 에 대해
매우 적대적이었을 뿐만 아니 라 헬라인들은 이방인이었으므로 이들의 낯선 방문에 대한 처리에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됩니다. 어쨌든 빌립은 함께 팀을 이루어 사역 하였던 안드레 (요 6:5-8)와 깊은 상의를 한 뒤 주님께 이방인 의 방문을 말씀드림으로써 당면 과제를 해결 하고 있습니 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사도 들이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는 아름다운 모습 을 볼 수 있습니 다.
그렇습니 다. 이처럼 혼자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함께 상의하여 가장 합당한 결론을 이끌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시절부터 내려오던 아름다운 전통이었 습니다.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할례와 같은 전통적 인 의식과 충돌하는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초대 교회 는 이에 대해 그 누가 독단적으로 일어 나 방향을 결정한 것이 아닙 니다. 즉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느 누가 자기의 은사와 권위 를 내세우며 일방적인 주장을 한 것이 아니 라 공회를 소집 하여 가장 올바른 하나님의 뜻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과 의 견 조정을 거쳐 가장 올바른 하나님 의 뜻을 찾아 이방 지역에 전함으로써 복음이 더욱 편만하게 전파되 도록 하였습니다(행 15:1 35).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역시 교회 안팎의 문제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만을 독단적으로 주장할 것이 아니 라 이처럼 마음을 같이하여 해결하려는 자세를 가져 야 하겠습니다. 그리 하여 하나님 께서 주신 다양한 은사와 경험,지식들이 모여 하나가 되어 연합함으로써 이 땅에 복음이 더욱 널리 전파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아름답게 확장되도록 해야 하겠 습니다. 또 그러 할 때만이 하나님 의 나라는 가장 효과적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 다. 왜냐 하면 하나님 은 모든 성도와 교회 가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 라 함께 연합하여 사역하 도록 한 몸으로 부르셨기 때문입 니다(엠 4:11,12).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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