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성가 : 선한 능력으로
찬송 : 315.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327. 주님 주실 화평
삼상14:46-48 영적 전쟁의 승리 비결.
1. 사단과 싸워 승리하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합니다.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이 말씀은 짧은 한 구절이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사울의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다라는 52절 말씀의 배경이 될 뿐만아니라
사울이 길보아산 전투에서 세 아들과 함께 전사하게 된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이번 전쟁에서 블레셋을 완전히 멸망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이번 전쟁은 블레셋을 박멸하고 오랜 전쟁을 종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를 먹고 기력을 회복하자
밤에 블레셋 사람을 쫓아 내려가서 섬멸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왜? 블레셋 군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고 철군하였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믿음의 용사 요나단에 의해 전쟁에서 승기를 잡고 블레셋을 끝까지 추격하여 섬멸하려 하였으나 제사장이 하나님에게 물어보고 추격하자 하였고 사울은 제사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하나님에게 물어보았으나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은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제비를 뽑았는데, 요나단이 뽑혔고 요나단이 제비를 뽑은 이유는 사울 왕의 금식령을 모르고 금식령을 범하였기 때문이고, 그래서 금식령을 어기면 죽을 것이라는 사울 왕의 맹세에 따라 요나단을 죽이려 하였으나 백성들이 전쟁 영웅을 죽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거세게 반발하여 실행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블레셋의 추격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이번만이 아니라 사무엘이 죽고 난 후 블레셋이 침입하였을 때도 하나님께 물었으나 응답이 없자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사무엘의 혼백을 불러 올리게 하였지만 자신의 죄악과 심판의 말만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사울의 범죄 함 때문이고 자신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일평생 블레셋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블레셋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날마다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고 형통하고 평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정립하지 못하면 인생은 성공할 수 없고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절대로 형통한 삶을 살 수 없고 불행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사단과 싸워 이기려면 기본적으로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하여, 내 자신의 내부의 적인 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선결 조건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도 사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기를 원하시지만, 우리는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말하면서도 실상은 자기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대로 착하고 선하게 하나님 자녀답게 살아가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주일 성수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시간이 되고 별일이 없으면 교회와서 예배드리고, 그렇지 않고 내가 세상일이 바쁘면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세상 친구와 약속이 있다고 예배 드리다가 나가고, 휴가라고 예배를 드리지 않고, 돈을 벌기 위해 교회를 가지 않고 세상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요즘 교회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있습니까?
세상을 향해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교회들이 재정 문제나 불륜, 성도간 분쟁, 등의 내부 갈등과, WCC와 동성애와 이단 종파들의 외부 문제 등으로 계속해서 세상에서 부정적으로 비추고 있으니, 교회가 세상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고 질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이런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먼저 우리 자신과 교회의 모습을 진지하게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정립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라면 어ᄄᅠᇂ게 하셨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모든 문제를 영적 문제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차지도 덥지도 않고 미지근한 믿음은 하나님이 토해 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뜨거운 믿음으로 믿음을 확고히 세우고 하나님 말씀에 적극적으로 따르고 순종하여
우리 속에 있는 악습과 잘못된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해결하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당당하고 힘있는 모습으로 온전하여진 후 세상을 향해 복음을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울의 경망스런 맹세로 자신의 아들이자 이스라엘을 구원한 영웅인 요나단을 죽이려 하였고, 완전히 승리할 수 있는 블레셋과의 전쟁을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나아가서는 자신과 자신의 세 아들이 함께 죽임을 당하게 될 불씨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해야 합니다. 어떻게 점검해야 합니까?
그 판단 기준은 예배자로 서 있는가? 말씀과 기도 생활을 하는가? 선한 열매를 맺고 있는가?
2.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 투쟁의 연속입니다.
47절과 48절은 사울이 왕위에 있는 동안 싸웠던 여러 나라와 족속들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은 이스라엘의 동쪽, 소바는 아람의 한 도시인데 다메섹 북쪽, 블레셋은 이스라엘 서남쪽, 아말렉은 남쪽 광야에 위치하고 있는 족속입니다. 이스라엘은 동서남북 사방의 적들과 끊임없는 전쟁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한두 민족이나 나라가 아니라 여러 많은 나라와 족속들이 이스라엘 사방에서 끊임없이 괴롭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47절에서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대적들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사울이후 다윗은 더 많고 복잡한 강한 대적들과 싸워야 했고, 다윗이후에도 애굽, 앗수르, 바벨론과 같은 주변 강대국들의 끊임없는 침공에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가나안은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지리적 요충지이기때문에 여러 강대국들이 거쳐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왜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밀어 넣으셔서 전쟁의 한복판에 살게 하시고, 그러면서도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명을 주셨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 선택받아 오직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의 길을 갈 때에는 대적을 정복하게 하시고, 반대로 믿음을 떠나 타락하면 대적들이 가시가 되어 찌르게 하시고 막대기가 되어 징계하심으로써
항상 하나님만 바라고 섬기는 민족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사면의 적들이 둘러싸인 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영적 이스라엘입니다. 우리 역시 사면의 대적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우리의 대적은 악한 원수 마귀입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역사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만 마귀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 성도들, 그리스도인들도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특히 교회 중직자나 주의 종들에게는 더 강력하게 역사합니다. 주의 종들에게 마귀가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이단종파가 되는 것입니다. 주의 종이 마귀에게 잡혀 이단 종파로 빠지면 그 밑에 있는 모든 신자는 다 함께 지옥행입니다.
이단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귀에게 휘둘리면 교회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이 복음으로 깨어 있느냐? 아니냐?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우리의 영적인 대적 마귀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누군가가 마귀에게 잡혀 나를 공격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일을 못하게 방해할 수도 있고, 유혹하여 죄에 빠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귀는 늘 우리의 주위에 맴돌며 우리가 약할 때 시험에 들게 하고 범죄하여 타락하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까?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영이 잠들면 안됩니다.
여러분 운전 중에 잠이 들면 어떻게 됩니까? 잘못하면 최종 목적지가 천국과 지옥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운전 중에는 잠들면 안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적 전쟁은 휴전이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는 영적인 잠을 자면 안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사도는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4: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영적인 잠에서 깨어 일어나 정신을 차리고 대적 마귀의 공격을 대비해야 합니다.
지금 일본에 강도7이상의 지진이 몇차례 일어나고 언제 또다시 대지진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거기에다 강력한 태풍 산산이 일본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모든 행사들이 취소되고, 일본으로 여행을 오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평온합니다. 안전합니다.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약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다면 태풍과 지진이 온다는 사실을 모른체
아무런 대비도 없이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 상황을 뭐라고 하죠? 폭풍전야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건 사고는 예고없이 찾아 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텔에 불이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경기도 부천의 모텔에서 불이나 많은 이들이 잠을 자다가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매연을 마시고 숨졌고, 어떤 남녀는 에어매트에 뛰어 내리다가 착지가 잘못되어 모서리에 떨어져 죽고, 그로인해 매트가 뒤집혀진 상태에서 남자가 뛰어내려 즉사하였습니다.
어떤 아들은 엄마에게 사랑한다 미안하다는 마지막 문자를 남기고 죽었고, 어떤 딸은 마지막을 직감하고 엄마에게 전화하여 장례를 치르지도 말고 자신의 일기장을 불태우라고 유언을 남기고 연기에 질식하여 숨을 거두었습니다.
새벽에 스타렉스를 타고 일하러 나갔다가 버스와 충돌하여 멀쩡하게 출근하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쳐서 영안실과 응급실로 실려갔습니다. 지금도 크고 작은 사건과 사고와 자연재해로 운명을 달리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하여 올여름은 무척이나 더웠습니다. 에어컨이 없었다면 견디기 힘든 날씨였을 것입니다. 기후변화로 인하여 지구가 점점 병들어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수록 우리는 옛날이 좋았다는 말들이 계속 나올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마지막 때가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종말도 다가오고 지구의 종말도 다가옵니다. 대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살전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6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여러분 지금은 영적인 잠을 잘 때가 아닙니다. 깨어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말씀과 기도 생활에 전념해야 할 때입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고
모든 공예배를 드리며 할 수만 있다면 새벽기도까지 드리며 영적 무장을 해야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이고, 내 사랑하는 가정이 사는 길이고, 사업장과 직장이 푸른 초장이 되는 길이며, 우리의 방주가 되는 교회가 거센 파도에 뒤집히거나 깨어지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소망 교회를 누가 지켜 줍니까? 아무도 지켜주지 않습니다. 내 교회는 내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하지 않고 내가 교회를 찾지 않고 내가 교회에서 예배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지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자녀의 영혼이 달려 있고 나의 영혼의 생사가 달려있습니다.
8절.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9절.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우리의 삶이 이처럼 투쟁의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 믿고 바라보라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라고, 하나님만 예배하고 섬기라고 하는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한 현실을 바로 알아야 하겠습니다.
위기인데도 위기인줄 모르는 사람에게 환란이 닥치면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위기인 줄 알고 영적으로 대비하면 어떤 환란풍파가 닥쳐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능히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항상 대적들의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시도 영적으로 나태하여져서는 안되겠습니다.
또 그런 현실로 하나님을 원망해서도 안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환경을 주신 의도를
바로 알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부단히 영적 투쟁을 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3. 세상적인 성공과 영적인 성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47절과 48절을 다시 보시면 사울은 왕위에 있는 동안 사면의 대적들과 용맹스럽게 싸워 이겼고
그럼으로써 이스라엘을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여 전사하기까지 이전의 싸움에서는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그러면 사울이 하나님에게 불순종하여 하나님에게 버림받았는데 어떻게 계속 승리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 것입니다. 그것은 사울이 범죄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시리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9:16). 따라서 사울의 계속되는 승리는 사울이 경건해서도 아니고, 사울의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며 하나님의 약속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는데 왜 계속 성공을 이루게 하십니까? 그것은 다음 왕위에 오를 다윗을 위한 승리이지 사울 자신을 위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진두지휘아래 전쟁을 치루어 이스라엘을 대적의 손에서 건졌지만 정작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아 자신과 세 아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면 남은 구원하였지만 자신은 구원하지 못한 것입니다(고전10:2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공로나 성공적으로 잘 되어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받으려 하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항상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을 거두면 그것이 성공의 모든 것이요 반대로 그렇지 못하면 모두 실패한 것으로 여깁니다.
소위 베스트셀러인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 라는 책을 보면 부자 아빠는 모두 성공하고 선한 사람이며 가난한 아빠는 모두 실패하고 어리석은 자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성도들 사이에도 이런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출세하고 성공하면 무조건 믿음이 좋고 축복받은 사람이고,
그렇지 못하면 축복도 없고, 믿음마저 없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오늘 사울의 예에서 보듯 세상적인 성공과 영적인 성공은 항상 일치하지 않습니다. 아니 심지어 정반대의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칭송을 받는다고 해서 무조건 거기에 도취 되거나 자만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욥12:6 강도의 장막은 형통하고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자는 평안하니 하나님이 그의 손에 후히 주심이니라
그리고 그 이전에 항상 먼저 자신을 살피고 조심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공을 거두고
그로써 세상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 영혼도 구하는 진정한 성공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벧전5: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통성기도
1. 사단과 싸워 승리하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서야 합니다.
2. 성도의 삶은 끊임없는 영적 투쟁의 연속입니다.
3. 세상적인 성공과 영적인 성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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