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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찬송하는자(스3:9~13)

28:7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저를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연약합니다. 부족합니다. 우리의 힘과 지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악한 원수 마귀가 우리를 공격하면 대책 없이 넘어질 수 밖에 없는 저희들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십니다. 능치 못하심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주님에게 피하였고, 주님에게 간구하였습니다. 그 결과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모든 대적을 파하시고 우리의 마음의 소원대로 하나님의 뜻하신 바대로 다 이루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크게 기뻐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이곳에서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나아가 주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돌리기를 원하오니 성령으로 함께 하여 주시옵시고,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 영적 인도자의 자세에 따라 교회의 분위기가 좌우됩니다.

9절에서 예수아를 비롯한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성전 재건 공사의 일을 적극적으로 관장하였다. 이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전 공장을 감독하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일어나’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어떤 일에 적극적인 마음과 자세로 임한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가기 전에는 영적 지도자들부터 온갖 죄에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램6:13에서 예레미야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한탄하였였다.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탐람하여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런데 바벨론 포로생활 70년을 마치고 귀환한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달라졌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일에서부터 백성들의 본이 되었다. 뿐만아니라 5:1,2에서 이방인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성전을 재건하는 일에 앞장서서 열심히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들은 주인의 행동에 따라 양의 성질과 성장이 달라진다고 한다.

목자된 주인이 양들을 잘 관리하지 않거나 포학하게 대하면 양들도 성질이 사나워지고

또 성장도 더디다고 한다. 뿐만아니라 병도 잘 걸려 폐사하는 양들도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 지도자와 성도의 관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면 성도들도 하나님의 일에 적극적이 되고,

영적 인도자의 신앙 인격이 성도들에게 영향을 그대로 끼치게 되고,

성도들은 영적 인도자를 그대로 본받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영적 인도자들은 선하고 의로운 행실로써 하나님의 일에 모범이 되어야 마땅하다. 벤전5:3에서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셨다. 영적 인도자의 행동 여부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뜨거운 충성심을 지닌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될 수도 있고, 냉랭하고 이기적인 성도들이 많은 교회가 될 수도 있다.

우리의 교회 분위기가 목회자와 성도간에 또 성도들 상호간에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면,

주님께 대한 충성심이 열심인 교회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지도자가 먼저 본을 보여야 한다. 그 길이 은혜로운 교회를 만드는 가장 빠른 길이다.

20:25,26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예수님도 섬기기 위해서 오셨는데 주의 종들도 성도를 섬겨야 한다. 성도 위에 군림하려 하고, 명령하여 따르면 좋아하고, 따르지 않으면 책망하고 배척해선 안된다.

성도를 감동시켜 그들 스스로 따르도록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한다.

딤전4:12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라고 하셨다.

설교는 잘하고서는 강대상에 내려와서는 믿음없는 말을 하고, 온갖 부정적인 말을 다 하고,

말로는 사랑한다하고 실제로 사랑을 베풀지 않고, 성도들에게 비판받을 행동을 하고,

성도를 돈으로만 보고 차별하여 대하거나, 교회 재정을 주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고, 계산적으로 운영하면 항상 부족한 가운데 생활하게 된다.

세상적인 기준을 교회에 적용해서도 안 된다. 신의와 정절을 지켜야 한다.

자신의 이익에 따라 한 순간에 손절해 버리고 적으로 돌리는 모습을 봐왔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나? 교인들은 다 떠나고 나이 든 사람만 모여 예배하는 양로원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2:7,8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함이라.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의 도덕도 법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그뿐만아니라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도록 애써야 한다. 그래야 세상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한소망교회에 가서는 예수님의 섬김의 리더십을 적용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그래야 성령님이 도우시고 역사해 주신다.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말씀대로만 살면된다.

(찬양: 살의 작은일에도-소원)

 

2. 성도의 찬송은 승리의 확신에 대한 믿음의 선포입니다.

10절과 11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즐겁게 찬송하고 있다.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지대 놓는 일은 건축의 가장 기초 공사다. 땅을 고르고 건물을 세우기 위한 기초석을 놓는 일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아직 즐거워하거나 찬송할 때가 아니다. 그런데 마치 성전 공사가 완성된 것처럼 기뻐하며 찬송한 것이다.

이제 성전 재건을 위해 첫 발을 내딪었을 뿐인데 성전이 완공된 것도 아닌데 하나님을 찬송하며 기뻐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그 권능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비록 지대만을 놓았을 뿐이지만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으로 백성의 일을 돌보시고 전능하신 권능으로 역사를 이루어주실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찬송을 부른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아산 한소망교회에 들어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신혁이가 분당우리교회에 합격하였다. 이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은 이제 시작 단계일 뿐이다.

한소망교회에 가서 분당우리교회에 가서 사역을 잘해야 한다. 사역의 열매들이 열려야 한다. 성령의 역사하심이 나타나야 한다. 성도들이 믿음과 헌신으로 충성하므로 교회가 부흥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려면 많은 시간과 기도의 노력과 헌신의 땀을 흘려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하여야 한다. 사역을 하면서 기쁨으로 찬양하고 힘들고 어려워도 때로는 눈물의 기도를 올려드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기뻐하며 찬양하며 감당해야 한다.

사역자는 이와 같은 믿음의 자세를 늘 지니고 있어야 한다. 앞길이 불투명해도, 또 사단의 권세가 득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해주실 줄 확신하고 찬송과 감사를 드려야 한다.

모세는 출애굽했을 때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출15:2)라고 찬송했다. 다윗은 사울에게 학대 받으며 도망 다니면서도 오히려 구원의 하나님을 찬송했다(시74:12).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포박당할 것을 아시고도 겟세마네 동산을 가시며 찬송하셨다(마26:30).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비록 현재는 대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반드시 하나님께서 의와 선하심 가운데 승리하게 해주실 것을 확신하는 ‘승리의 찬송’을 드렸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흔들림없는 확고한 믿음으로 승리를 선포하는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찬송은 믿음의 결정체다.

우리도 사역을 하다가 어려운 문제와 난관이 닥쳐오면 낙심하거나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소망하며 찬송하자. 56:4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쫓아 찬양할지어다라고 하신다. 고난 가운데 성도의 찬송은 사단을 물리치는 힘이 된다.

반대로 원망과 불평은 믿음이 없다는 증거이고, 사단의 권세에 억눌리게 되는 불신앙적 행동이다.

우리가 감당치 못할 문제를 만날수록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며 더욱 기뻐하고 찬송하자.

그러면 오래지나지 않아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믿음의 찬송은 사단에 대한 승리의 선포다.

하박국 선지자는 나라는 이방나라에 멸망하여 자신의 재산이 다 사라지고 지금 당장 먹을 거리가 없음에도 이렇게 찬양하였다.

3:17,18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도 학원생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수입보다 지출이 많고 사역은 고사하고 생활이 안되는 상황에서 40일 작정기도를 시작하였다. 40일이 다 차기도 전에 굴직한 기도응답이 이루어졌고 이제 남은 며칠동안 더 간절히 기도하여 소소한 것까지도 다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은혜롭게 마무리 되어 하나님을 간증하는 일이 완벽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나가야 할 것이다.

(찬양 비준비하시니)

 

3.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흘리는 통곡의 눈물도 찬송의 하나입니다.

12, 13절을 보면 성전의 지대가 놓인 것을 본 여러 노인들이 통곡한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통곡한 노인들은 첫 성전 곧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이다.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것은 B.C.586년의 일이므로 포로 귀환자들이 성전 지대를 놓았을 때로부터 50년 전의 일이다. 그러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 포로 1세대 중에 생존하여 귀환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예전에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성전 지대가 놓인 것을 보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들은 슬플때도 울지만 기쁠때도 눈물을 흘린다.

그러면 이스라엘 노인들의 눈물은 슬픔의 눈물일까? 기쁨의 눈물일까?

이스라엘 노인들이 흘린 눈물은 슬픔과 기쁨이 교차된 눈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왜 슬퍼하였을까?

학개서를 보면 포로 귀환자들이 건축한 제2성전 곧 스룹바벨 성전은 솔로몬 성전에 비하여 너무나도 보잘것 없었다. 솔로몬 성전은 오랜 기간에 걸쳐 준비되어 건축되었다.

건축 재료도 모두 최상의 것들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울 수밖에 없었다.

그에 비하여 스룹바벨 성전은 불과 1년여의 준비 끝에 공사가 착수되었다.

자연히 솔로몬 성전에 비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초라함은 전 지대를 놓으면서 이미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솔로몬 성전을 본 노인들의 마음이 서글플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 화려했던 솔로몬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성전이 파괴된 것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이라 그들의 마음은 찢어질 듯이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며 통곡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기쁨의 눈물도 흘렸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자신들의 죄 때문에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두 번 다시 성전을 보지 못하고 이방 땅에서 수치스럽게 생을 마감하리라 생각했는데,

정말 기적적으로 이 노인들은 다시 귀환하여 하나님의 전 지대가 놓이는 것을 보고는

감격의 눈물이 흐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비록 재건되는 성전이 첫 성전에 비하여 보잘것 없는 것이기는 하였지만, 하나님이 자신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회복시키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기쁨의 눈물을 흘린 것이다.

노인들이 흘린 통곡의 눈물은 회개와 감격의 눈물인 것이다.

회개와 감격의 눈물은 어떤 아름다운 찬송 못지않다.

노인들의 통곡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 찬송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예배가 되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흘리는 눈물은 어느 찬송 못지 않게 귀하다.

왜냐하면 울음은 인간의 시작과 끝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울고, 살아가면서 울고,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도 울면서 하나님께 돌아간다.

때로는 수많은 감사의 말보다 신앙의 감격의 울음이 오히려 하나님을 감동시키고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은 그 비참한 처지에 슬퍼하였으나(시137:1-4),

지금은 자유의 기쁨과 성전 재건의 감격에 통곡하는 것이다. 이 통곡이야말로 큰 찬송이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시고, 성도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간증이 된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아름다운 찬송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수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믿음에서 우러나온 회개의 눈물도 구원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도 다 귀한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송과 같으며(녹6:21), 성도들에게 은혜를 끼치는 간증이 되고,

또 불신 이웃에게 전도의 통로도 되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대한 순수한 눈물이 메말라 가는 시대에 성도의 눈물은 그만큼 값지다. 자신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죄와 치유의 은총을 가져다주고, 마음이 굳어 있는 불신 이웃에게는 양심을 흔드는 메시지가 되기 때문이다.

죄 때문에 슬퍼서, 또 죄사함받은 은혜에 기뻐서 울음이 나오면 울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죄 때문에 한번도 울지 않고 감사의 눈물을 흘린 적이 없는 불신자들은 지옥으로 떨어진다.

6: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그리스의 철인 플라톤은 “잘 시작한 일은 벌써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고 하였다.

성경도 올바른 자세로 시작하는 일은 성공한다고 한다.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있어 지도자들부터 솔선수범하여 율법의 규례대로, 또 온 백성들의 찬송과 감사로 일을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믿음과 충성의 자세로 연합하여 일을 했기에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가능했던 것이다. 시작하기 전부터 말썽이 나고 다투는 예가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성전 재건을 시작할 때의 이스라엘 자손들을 본받아 무슨 일이든지 합당한 자세로 시작해야 한다.

즉 열심과 치밀한 준비와 화합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무슨 일이든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하는 자세를 일이 끝날 때까지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주변에는 성령으로 시작했으나 육체로 마치는 경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갈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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