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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인내하는자(스3:3~6)

24:10 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의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지금 환란 가운데 있습니다. 세상일을 하다가, 육신적인 일을 하다가, 잘먹고 잘살고 인생을 즐기기 위해 살다가 환란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다가, 영적인 일을 하다가, 영혼 살리는 일을 하다가 환란과 핍박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환란과 핍박으로 낙심하고 좌절하고 근심하고 걱정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은 바로 말씀처럼 네 힘의 미약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 저의 믿음이 얼마나 부족한지, 제가 얼마나 무능하고 무지한지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리고 내 힘과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도 다시 한번 보여 주셨습니다. 바라고 원하오니 저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5:3,4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앓이로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환란이 닥칠수록 하나님이 저에게 베풀어 주실 기적을 바라보고, 인내와 연단을 통해 소망이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고,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때까지 잠잠히 참으면서도,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하며, 기다리는 굳건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 환란뒤에 평안이 오려면, 위기를 넘어서는 신앙성숙이 필요하다.

3절. “무리가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단을 그 터에 세우고 그 위에 조석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며” .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다는 것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국 백성을 두려워하면서도 무너진 제단에서 밤낮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해석하건 중요한 것은 밤낮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열국 백성은 누구이며, 왜 그들을 두려워하였냐는 것이다.

열국 백성은 이스라엘 땅 주변에 살던 이방 족속들이다.

이 이방 족속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 이스라엘 땅에 들어와 살고 있었는데,

이제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땅으로 돌아옴으로써, 자신들이 쫓겨나게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을 적대시하여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상황이라 큰 위기감을 느끼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스라엘이 위기감을 느끼고 떨기만 하고 있었나? 그것은 아니다.

그들은 두려울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것도 조석으로, 아침저녁으로, 밤낮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에게 간구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위기감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더욱 하나님만을 의뢰케 하고

더 열심히 예배를 드리도록 한 요인이 된 것이다.

성경의 역사와 교회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평안할 때보다 위기를 맞았을 때 더욱 부흥한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시대의 교회처럼 평안하고 권세를 부리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오히려 타락한다.

우리 삶에도 적당한 긴장감과 위기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성장하고 발전한다.

왜냐하면 믿는 자가 환난과 시련을 당하면, 더욱 더 하나님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게 된다.

더욱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되고, 작은 죄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다.

그러니 위기 속에서 믿음이 더욱 성장한다. 우리가 지금 삶의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말씀대로 잘 안된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위기감을 주셨나?

우리의 신앙와 믿음을 강하게하기 위해서, 그리고 난 후 더 큰 사역을 맡기시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작은 죄도 짓지 말고, 낙심하지도 말고, 근심하지도 말고 오직 하나님께 매달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주의 일을 하다가 엄청난 시련에 빠져 죽음 직전에 이른 고린도 교회의 동역자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다.

고후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로 인하여 바울이 여러 가지 환란을 겪게 되자

에베소 교인들이 낙심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또 이렇게 편지하였다. 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

지난 6월에 대광교회를 사임하고 학원에서 예배를 드리며 이알이선교비전의 큰 부흥을 기대하였으니 오히려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우리의 비전은 아이들에게 평상시에 복음을 심겨주고 주일 오후 2시에 함께 예배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목사인 내가 합류 후 아이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데면서 예배에 참석하지 않더니, 결국은 아이들 아빠를 통하여 마귀의 공격으로 예배는 고사하고 학원 자체를 떠나 버렸다.

그런데 다행이 또, 3명의 아이가 더 와서 잠시의 희망을 품었지만 한두번 예배 드리다가 그 아이들도 예배 드리기 싫다고 다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아이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더라도 공부 전에 하는 QT라도 잘하면 된다고 위안하며 초5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왜냐하면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고 기도도 잘하였기 때문이다. 정말 뜻하지 않게 또 부모들이 이번에는 QT를 핑개로 말하지 않고 공부를 핑개로 다른 학원에 가버렸다. 다른 학원에 가면서도 학원을 한 달을 마치고 간 것이 아니라, 1/3을 하고 1/2을 하고 반납하는 일이 계속되더니, 급기야는 무식한 부모에게 험한 일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인 줄은 알지만, 그리고 어짜피 다른 사역지로 가게 되면 이알이를 정리해야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자존심 상하고 비참할 정도로 급격하게 무너지리라 상상하지도 못하였다. 거기에다 형제자매들까지 합세하여 나와 나의 가족들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인신공격을 당하고 있다. 그렇다고 낙심하여 좌절에 빠져 있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 빠졌을 때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3: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신뢰함이니이다

 

2. 하나님의 연단하시는 은혜를 기억할 때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4절에서 고국으로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초막절을 지켰다.

초막절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여

광야에서 40년간 연단시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로 만들어 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다.

아마도 페르시아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옛날 모세를 통해 조상들을 광야에서 연단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을 70년 동안 바벨론에게 연단 받게 하신 은혜를 기념하고 더욱 감사했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베푸신 모든 은혜를 잊지 말고 항상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다(신4:9; 6:10-12), 특별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신 은혜뿐만 아니라 죄를 범했을 때 징계와 연단으로 내자신을 온전케 만드신 은혜도 기억해야한다. 8:2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하였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징계와 연단을 기억해야 하나? 그것은 다시 같은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서다. 죄의 무서운 결과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실패한 원인을 잘 아는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

신학자 칼빈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징계는 제2의 은혜 라고 하였다.

계3:19 하나님은 사랑하는 사람을 징계하신다. 그러므로 징계도 하나님의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이 징계의 은혜를 기억하는 성도가 지혜로운 성도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두 번 다시 죄악의 길, 그릇된 길로 가지 않고, 모든 일에 조심하고 근신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제부터 타락하기 시작했나?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을 구속해 주시고 가나안 땅을 얻게 해주신 은혜를 잊고 광야 40년간의 연단을 잊어버리기 시작한 때부터다. (삿2:10-15;3:7)

9:7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여호와를 거역하였으되

벧후2:20-22은 하나님께 연단을 받고도 그것을 잊고 또다시 죄악의 길로 행하는 자를

자기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부정하고 미련한 개와 같다고 하였다.

50:22 하나님을 잊어버린 너희여 이제 이를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찢으려니 건질 자 없으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께 징계받던 때의 괴로움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기억은 우리 신앙 여로의 나침반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고전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3.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 매순간 충성과 헌신을 재다짐 해야 합니다.

5절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를 드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즉 백성들은 매일 드리는 상번제와 월삭을 비롯하여 각종 절기의 제사를 빠짐없이 드렸다.

또한, 자원제도 함께 드렸다. 특히 이 자원제는 하나님 은혜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와 헌신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자원제를 드렸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충성심으로 충만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교훈을 얻는 것은,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매일 충성하고 헌신해야 한다. 그렇지않으면 믿음의 열기가 식어지고 퇴보하게 된다. 사람은 망각의 존재다. 무엇이든지 잘 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의 은혜도, 자신의 의무도,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변하면 잊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무사 안일에 빠져 나태하고, 습관적으로 신앙생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되지 않기 위해 매일 매순간 헌신의 결단을 해야 한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이 타락한 것도 자신의 의무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매일 헌신을 다짐하는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6:19 늘 죄를 멀리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려라고 하였다.

우리의 삶은 매일매일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결단의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선과 악, 죄와 의,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두 갈래 길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매일 매순간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결단이 없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다.

이 원리를 기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매일 충성과 헌신을 다짐해야 한다.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죄사함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6절 “칠월 초하루부터 비로소 여호와께 번제를 드렸으나 그때에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지 못한지라”. 이 말씀은 성전의 재건의 시급함을 말해 준다. 속히 성전이 재건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전이 하나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이고,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며, 선민 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성전 건축의 시급함 뿐만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속죄 일을 준수하지 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속죄 일이란 7월 10일에 지키는 절기다.

이때 대제사장은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죄를 속하였다.

이 의식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1년 동안 하나님께 지은 모든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히9:1-7). 하지만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른 모든 절기는 지키면서도 이 속죄 일만은 지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속죄는 성전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아직 성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전 재건은 시급한 일이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로 그들의 신앙 생명을 유지하는 통로이고,

하나님의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편이었다.

죄사함을 받고 정결케 된 백성들만이 거룩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다.

더욱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죄사함을 받을 수 있는 속죄 일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하였다. 본문의 “여호와의 전 지대는 오히려 놓지 못한지라” 는 말에는 바로 이러한 간절함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오늘날 우리에게 말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구약의 성전은 죄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 성전이 예표하는 실체이시며, 또한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기도 하다.

예수님은 성전이 예표하는 실체이자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전의 지성소에 들어가 자신의 피로 죄인들의 죄를 속하셨다.

그런즉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함받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10: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죄사함을 받지 못하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하셨다.

사람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도 자신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왜 그렇게 성전 짓기를 염원하였는지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은 결국 자신의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지 못하고 그 죄 가운데서 영원한 멸망에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선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영원한 하나님의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고 의뢰해야 한다.

(결론)

119:71은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라고 고백하였다. 이 말씀은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삶을 통해 그대로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도, 율법도, 또 그 절기들도 귀한 줄 몰랐었다.

오직 물질과 우상을 따랐고 탐심을 쫓아 행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자리 잡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단을 받고 귀환한 후에는 하나님을 귀하게 여겼다. 하나님의 율례를 소중하게 여기며 지키려고 힘썼다. 뜨겁게 하나님을 사모하여 하나님이 정하신 절기를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이고, 제사드리고 예물을 풍성히 드렸다.

우리에게 오는 고난은 지금 즐거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고난은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바른 삶을 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오는 고난으로 인하여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고난 속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발견하고 그 고난을 통하여 더욱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진실한 성도들로 거듭나기에 힘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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