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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20:6~13)백마디말보다 믿음의 행동

119:33~35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끝까지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여 주소서 내가 주의 법을 준행하며 전심으로 지키리이다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새벽에도 저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알게 하옵시고, 또한 깨달은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옵소서. 저희가 말씀의 길로 따라갈 때 악한 원수 마귀가 떠나가고 질병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되고 모든 일들이 주의 뜻대로 순탄하게 풀려나고 날마다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을 살아가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206~13.

1. 모법을 보이는 하나의 행동이 백 마디 말보다 더 힘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예수님의 무덤에 왔으나 시신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렸습니다. 그 말을 들은 베드로 요한이 힘껏 달려와 요한이 먼저 도착하였으나 두려움으로 먼저 들어가지 못하고 뒤늦게 도착한 베드로가 거침없이 무덤에 들어가 빈 무덤을 확인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요한도 뒤따라 들어가 예수의 시신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마리아의 말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베드로의 용기 있는 행동이 요한에게 영향을 끼치듯이 나의 모범을 보이는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알면서도 선뜻 결단하지 못하고 머뭇거릴 때에 누군가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이면 다른 사람들도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나의 믿음의 행동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은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모든 일에 본을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안고 있는 크고도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이 도덕적으로 성적으로 너무 심각하게 타락한 것을 보거나, 윤리 의식이 실종된 모습들, 부정과 불법과 편법으로 사회 정의의 무너진 모습을 보고 한탄하며 세상 종말이 가까웠다고 말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탓합니다. 그러나 사회가 타락하고 불법이 만연한 시대가 된 것은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또 모범을 보이지 못했으므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주님의 책망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는 것은 말 아래 두기 위함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어 방안을 환하게 밝히려는 것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사 이 세상에 두신 것도 어두운 세상을 밝히 비추기 위합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사명을 잊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이 세상에 문제가 많고 또한 교회 안에도 문제가 많아질수록 믿는 사람들, 주의 은혜를 경험하여 아는 우리들의 역할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이 앞선 우리는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보다 믿음이 어린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믿음의 삶을 살도록 모범을 보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부패하고 타락한 세상에서도 우리는 결코 썩지 않고 세상의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므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은 의외로 엄청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성도들은 주께서 주시는 기회들을 충분히 활용하여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만 하겠습니다.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하셨습니다.

살후3: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 려 함이니라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믿음이 앞선 자가 철저히 예배를 철저히 드리고 전심으로 기도하고 힘써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성도들에게 보이면서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이 좋은 일에 동참하기를 권면해야 합니다.

 

예수의 시체가 없어진 현장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생각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시신을 누가 빼돌렸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에 휩쌓였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께서 미리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믿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우리도 이와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의 약속이 확실하고 분명함에도 믿음이 없어 걱정하고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것은 이들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약속을 우리의 머리로 이해하고 분석하여, 될 것 같으면 따르고 내가 판단하여, 안될 것 같으면 따르지 않는 내 기준의 신앙으로 살아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무조건 믿고 받아드리고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앙 생활에 실패하는 것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고 판단하려 해서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각 사람의 중심의 무게를 하나님은 저울에 달아 보십니다.

11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밖에 서서 울면서 몸을 구푸려 예수께서 계시던 무덤 속을 들여 다 보았다고 합니다. 그녀는 무덤이 빈 사실을 베드로와 요한에게 알리고 나서 뒤따라 다시 무덤으로 되돌아온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달려와 시신이 없어진 것을 확인하고 그냥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9절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누가 시신을 훔쳐 간 것으로 오해하고 힘없이 발길을 돌린 것입니다. 그것은 마리아도 마찬가지였지만 마리아는 돌아가지 않고 혼자 남아서 슬프게 울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진실한 것이었는지 잘 알게 합니다.

이 자리에는 아침 일찍 함께 왔던 다른 여인들과는 같이 있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가 거기에 함께 있었다면 예수께서 마리아만 부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그녀가 예수를 만나고 다시 제자들에게 전할 때에도내가 주를 보았다고 하지 않고 우리가 주를 보았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막달라 마리아 혼자서 무덤에 남아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안타까워하며 슬피 눈물을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녀는 주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과 능력의 예수님이 허무하게 죽임을 당하시고 그 시신까지 사라진 것에 대한 허탈감으로 한없이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은 말로 그 무게를 젤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혀로만 하는 사랑은 진실이 아닙니다.

마음의 무게가 실린 사랑이라야 참되며 그것이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에 중요시하시는 것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십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심의 무게를 저울에 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경건이나 사랑이나 말과 혀로만 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면 안되겠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행하였고 예수님에게 책망 받았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주를 사랑한다면 우리 마음의 무게가 예수님에게 쏠리게 될 것이며,

이것은 거짓없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위선과 가식이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겠지만 하나님은 속이지 못할 것입니다.

 

3. 주를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주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2, 13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의 무덤에서 두 천사를 만납니다.

또한 14-18절에서 막달라 마리아가 가장 먼저 부활하신 예수님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을 대표하는 베드로와 요한도 예수의 무덤에 왔었지만

그들은 천사와 예수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서는 막달라 마리아 외에 다른 여인들도 천사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른 여인들보다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 혼자 처음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먼저 막달라 마리아에게만 보이시고 나중에 무덤에 함께 온 다른 여인들에게도 보이셨던 같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의 제자들도 만나지 못한 부활하신 주님을 막달라 마리아 혼자 만났다는 사실을 통해서 주님은 어떤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가를 확인하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었거나 직분이 높거나와 전혀 관계없이 다만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와 주님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에 따라 결정됩니다.

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은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찾아오십니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님을 간절한 마음으로 사모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만나는 은혜로운 경험을 하게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세상 종교처럼 주술적인 방법이나 신비한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동떨어진 먼 곳에 계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까이에 계십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사모하여 찾는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이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하시고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신 사건은 이에 대한 분명한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신다면,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직도 주님을 만난 경험이 없으시다면, 오늘 이 새벽에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놀라운 기쁨을 맛보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믿음에 앞선 우리가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이고, 험하고 악한 세상 속에서 진실하고 거룩하고 정결한 삶을 살아가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을 모시고 우리의 마음의 무게를 달아 보신다고 하셨사오니 바리새인처럼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자신을 나타내고 들어내려 하지 말고, 언제나 항상 주님이 보고 계신다는 신전의식을 가지고 주님만을 위해 살아가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가 나를 만나리라 하셨사오니,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기도하다가 주님을 만나고, 삶 가운데에서 언제나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께신 우리 아버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