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08:1~4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정하였사오니 내가 노래하며 나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리로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고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양하오리니.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보다 높으시며 주의 진실은 궁창에까지 이르나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평안할 때나 힘들 때나 어떠한 기분과 상황에 상관없이 언제나 항상 주님을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또한 낮에도 밤에도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만 하루가 시작되는 이 새벽에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찬양합니다. 주님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시어, 말씀과 기도로 새벽을 깨우는 축복된 삶을 살아가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19장23~27절.
1. 우리가 십자가의 예수께 얻어야 할 것은 군병들처럼 예수님의 겉옷이나 얻으려해선 안됩니다.
23, 24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군병들은 그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옷을 나눠 가졌습니다.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 가시고 있는데 군병들은 바로 그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나누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 것입니다.
물론 십자가에 못박힌 죄수의 옷을 사형 집행인들이 나누었던 것은 당시 관습이었고, 물품이 귀했던 당시로서는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구세주이신데 그런 사실도 모른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고작해야 피와 땀으로 얼룩지고 다 낡아빠진 겉옷 한 벌과 속옷 한 벌을 나누어 가지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일입니까? 인류의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도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도 부족하여 피 묻은 옷을 나누어 가지려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불쌍한 인생들입니까? 그들은 겉옷을 얻는 대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우리는 무엇을 구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로 나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그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님께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날고 냄새나는 주님의 겉옷을 구하는 로마 병사처럼 우리가 만일 개인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물질과 세상적인 욕심을 구하고 우리가 만일 주님께 그렇게 자기 욕심을 따라 세상의 것들만 구한다면, 주님이 우리의 그러한 욕구를 만족시켜 주지 않을 때 우리 또한 피흘려 죽으신 예수님을 외면할 뿐만 아니라 고통 중에 계신 주님을 원망 불평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기독교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께 그런 하찮은 것만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님이 이세상에 오신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찮은 것들만 구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나와 물질적 만족을 구할 수도 있고, 또 평강과 위로를 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께 구할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나아오신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 구할 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 가족과 친지와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일이고 그외 나머지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우리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고 마음의 평강과 안정과 위로도 더하여 주십니다. 군병들과 같이 어리석은 것을 구하지 마시고, 생명을 구하고 천국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헛되고 헛된 것을 구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요4:10)
그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헛된 것을 구하지 말고 이것을 구하라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6, 27) 한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구하시고, 영생의 양식을 구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2. 예수님과 끝까지 함께하는 사람만이 그분에 대한 사랑의 진실성을 입증 받게 됩니다.
25절에 보면 예수의 십자가 밑에 서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지켜보는 네 여인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와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의 모친이었고 한 사람은 이모이고, 다른 두 여인은 예수와 그 제자들을 섬기던 헌신적인 추종자들로 예수께 대한 사랑은 각별 했습니다. 요한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사도들조차도 두려워서 모두 달아난 상태에서, 이 여인들이 골고다 언덕까지 주와 동행했다는 것은 진실하고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끝까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주의 사랑의 진실성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신다는 약속(마28:20)과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강림을 통한 이 약속이 실현되었습니다(행2:1-4),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 대한 사랑의 정확한 잣대는 어디까지 예수님과 함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시는 자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기적의 먹을 먹는 자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곳이 인적이 드문 광야였음에도 수많은 군중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앞 다투어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겟세마네 동산에까지 함께한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시는 골고다 언덕 위에까지 함께한 이들은 불과 몇 명 뿐이었습니다.
예수를 쫓고 그분의 제자임을 자처한다 하여도 예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혹시 자신이 그러한 사람은 아닌지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참으로 사랑하는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함께하는 것은 물론이고 모든 것을 다 드려서 헌신하게 됩니다. 이것이 없다면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엇이든지 아낌없이 주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속성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 이해 득실을 따지고 자신에게 이익이 있다고 판단이 되어야 만 하는 이들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따라다니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 분이 어디로 가시든지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그곳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골고다 언덕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따라가야 합니다.
주님이 계신 그곳이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우리의 모든 것을 헌신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만이 예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입증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14:7, 8)
3.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혈연 관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습니다.
26. 27절에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일곱 마디의 말씀 가운데 한마디의 말씀입니다. 먼저 예수께서는 모친 마리아에게“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요한 사이에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어주신 것입니다.
제자 요한에게 단순히 자기 모친의 부양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리아의 부양을 부탁하려면 자기의 친동생들에게 해야 더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동생들이 네 명이나 있었습니다. 또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들도 이제는 성년이 되어 능히 마리아를 부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시게 하신 것은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루어질 새로운 공동체를 염두에 두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강림으로 이루어질 교회 공통체에 속한 사람들이 혈연 관계를 초월하여 새로운 가족 관계를 맺게 될 것이란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한 가족입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피를 나눈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수 공동체도 한 가족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성도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사람의 피 보다도 귀하고 값진 예수의 피를 다 나누어 받은 한 가족인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한 하나님을 다같이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해서 가족이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에 우리는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도를 가족으로 보았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로 보고, 형제 자매로 보고, 아들과 딸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가진 모든 것이라도 아낌없이 주었습니다. 행2:44~47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나라에서는 혈연에 따라 가족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한 분아버지와 형제 자매들만 있습니다. 이 땅의 교회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예표로서 우리가 그런 하나님 나라의 관습에 적응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는 곳 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나라에서와 같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 모든 성도들을 한 가족으로 여기며 살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이것은 말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직 마음을 쏟아 성도들을 진정 피를 나눈 가족으로 섬길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것처럼 살면 이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는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말씀을 마12:49~50에서 하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시더라.”
주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형제자매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겉옷과 속옷을 가지려고 래쓰는 로마 병사처럼, 저희들이 자신의 세상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예수님에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확실히 예수님을 믿음으로 천국을 소유하고,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하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는 것에 우리의 관심과 기도가 집중되게 하옵시고, 또한 떡을 먹기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지 말고 이적과 기적을 따라가지 말고 오직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므로 예수님이 가시는 어떤 곳이라도 따라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는 주안에서 다 형제자매입니다.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거나 분쟁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고 위해주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진정한 예수의 피로 하나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