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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예수님은 나의 변호사

84:5-7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주님의 전에 나와 예배하며 기도하는 성도님들에게 시온의 대로를 열어 주시고, 주님을 더욱 더 사모하는 마음을 주시고, 신령한 축복의 주인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일서 21-10.

 

1. 성도에게는 완전한 변호사가 이미 선임되었습니다.

1절을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언자라는 말은 중보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보자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거나 적대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화해시키고, 한 마음으로 일치시키는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의 역할을 하는 사람을 중보자라고 합니다.

아브라함과 모세 그리고 구약의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을 일컬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불완전한 인간이라 완벽한 중보의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해마다 속죄 제사를 거듭해서 드리는 것만 보아도 그들의 중보 사역은 불완전한 것을 증거합니다. 하지만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연약함을 체휼하지 않으시고, 흠 없고 점 없는 거룩한 몸을 화목 제물로 드렸기 때문에 단 한번의 제사로 완전한 속죄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7:27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고 하며 예수님을 참 제사장이며 참 대속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참된 중보자이십니다.

딤전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이것은 과거의 사건이 아닙니다.

현재에도 예수님의 중보 사역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 이뤄질 것입니다.

여기에 성도가 가지는 안정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자가 되셨다는 사실이 우리 각 개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인간은 곧 있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형벌 중 하나를 선고받아야 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사단의 속임수로 영적 감각이 무뎌져서 이것을 잘 깨닫지 못하지만,

죽음 앞에서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면 이 심판의 엄중함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에게는 누가 있습니까? 완전한 대언자 즉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우리를 변론해 줄 가장 확실한 변호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죄인입니다’ 라고 외치는 사단 앞에서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내가 그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라고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9:14, 15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홈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이를 인하여 그는 새 언약의 중보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본절의 말씀으로 인하여 평안함과 안정감을 찾고,

예수님의 은혜로 인해 감격에 겨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대언자 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중보 사역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자의 마땅한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마지막 심판 때까지

초조해하지도 말고, 두려워 떨지도 말고 오직 우리는 믿음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킵니다.

3절에 보면“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안다는 말은 다른 복음서에 비해 요한복음에서 특히 많이 등장하며 요한서신에서도 중요한 의미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알다 라는 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지각하다 라는 의미를 넘어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절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크신 은혜를 받은 성도들에게는 어떤 증거가 나타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도들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또 어떤 것으로 보이지 않는 사랑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하여 요한은 분명한 답을 주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자가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크신 은혜, 곧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사하셨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죄를 지어도 이미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죄의 종이 아니라 의의 종입니다.

의의 종은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지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 사항이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7:21)

여러분,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서로의 말을 듣고 그 말대로 해주는 것을 기뻐합니다.

그뿐 아니라 상대방의 말 이상으로 마음을 감동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마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습니까? 말입니까? 예물입니까? 아닙니다.

오직 한 가지, 사랑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3. 세상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4절에 보면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해도 그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예수님을 안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의 열매가 예수님을 닮았는가를 통해 그가 진정으로 주님을 아는 자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영적 원리를 일반화시키면, 우리의 속은 겉으로 표출되기에 곁을 보는 것은 속을 알 수 있는 한 척도가 된다는 뜻입니다.

결국 신앙에 있어서도 내적 동기에 따라 행동이 나타나며, 행동을 통해 내적 동기를 판단할 수 있는 모종의 인과율이 작용한다 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인과율이라 합니다. 인과율이 기독교 복음과는 상관없다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죄를 짓는다고 해도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따라서 우리는 오직 은혜로 용서함 받았으니 인과율은 기독교와는 상관없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인과율이 가장 잘 적용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인과율이 없었다면 예수님이 죽으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과율에 따라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6:23) 인간은 죽음으로써만 반드시 그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칙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사함도 없는 것입니다( 9:22).

물론 누군가 죄 없는 자가 대신 죽어준다면 죄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 가운데는 죄 없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의 자손으로 난 자는 다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2위 성자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인간을 대신하여 죽으심으로써

죄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독교는 철저히 인과율이 적용되는 종교인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인과율의 법칙은 우리의 마음과 행위에만 적용되는 신앙 원칙이 아닙니다.

신앙 아니 인생 전반에 걸쳐 있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경제의 문제에 있어 작용되는 큰 원칙이 무엇입니까? 바로 심은 대로 거둔다 는 것입니다.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는 법입니다.

죄와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심으면 형벌을 얻고, 의를 심으면 영광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3:10, 11 “너희는 의인에게서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니리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의 말씀으로 확실히 증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요행과 우연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만약 우리가 요행과 우연을 기대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실과 정직한 모습으로써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을 믿으며 우리의 자리에서 우리가 심어야 할 것은 기도, 행함, 믿음, 사랑, 봉사, 연보, 격려, 위로, 이런 것을 심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저희들에게 완전한 변호사가 되셔서 마지막 때에 우리를 변호해 주심을 인하여 감사합니다. 저희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으로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한 세상은 심은 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법칙대로 움직인다는 것을 인식하고 영적인 것 많이 심고 거두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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