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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예수와 사귀어 살아야

77: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하나님께 내 음성으로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하나님 아버지, 너는 내게 부르짖어라 내가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고 약속하신 주님, 그럼에도 저희들은 게으르고 완악하여 부르짖지 않아 하나님의 응답을 듣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일을 모르며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이 새벽에도 주님의 전에 나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저희들에게 말씀하여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고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342장 어려운 일 당할때, 요한일서 11-5.

1. 인류에 나타난 최대의 이적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2절에 보면“이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신비적인 지식이나 이성에 의한 사고, 고상한 도덕, 혹은 세상의 권력과 재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줄로 알고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놓인 깊은 죄는 이러한 것들로 메워지지 않음을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 이 땅에 나타나 비추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는 우리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이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나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빛이 이 땅에 온 것은 인류 역사 곧 생명을 갈망하고 삶과 죽음의 공포 속에 있던 모든 자들에게 그 해답을 제시하는 시초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육체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영생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로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과 귀에 보이도록 나타나셔서 인간의 힘과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육신은 인류 역사에 있어 최대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 획기적인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1장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곧 예수님의 탄생과 그의 삶으로 하나님의 모든 비밀이 해결되었다는 말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경험한 사람입니까? 바로 인류 최대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구약의 옛 선지자들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예레미야 등 구약의 모든 자들이 경험하지 못한 그 기적을 우리는 경험한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그들보다 믿음이 약해질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바라고 있습니까? 인류 최대의 기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극히 작은 기적을 바라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진정 우리가 감사하고 감격해야 할 기적을 우리는 이미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 곧 성육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 진 마땅한 도리는 인류 최대의 기적을 베푸신 주님께 깊이 감사하며 인생을 살아가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교제 대상은 누구입니까?

3절에 보면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 우리는 사도 요한이 본 서신을 받는 자들에게 매우 자랑스럽게 전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 현대어 성경으로 해석하면“우리가 여러분들에게  우리의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것은 여러분들도 우리처럼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가 됩니다.

3절의 핵심이 무엇일까여? 그것은 바로 사귐입니다. 사귐이라는 말은 원어로 코이노니아로 성도의 교통,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성도들간의 교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하나님과의 교제에 초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구약에서는 희생 제사의 참여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완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완전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두셨습니다.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온전한 사귐을 가능케 하신 사건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하나님 간의 사귐을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아름답고 영원한 교제는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3절에는 당당한 모습으로 이 아름답고 영원한 교제로 초청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 초청을 받아야 하는 사람, 즉 아직도 그 교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영원한 생명을 주는 교제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도 안타깝게도 그들은 잠시의 쾌락과 사귀며, 돈과 사귀며, 명예와 사귀며, 권력과 사귀는 등 결과적으로 영원한 형벌이 주어지는 것 과만 교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이 요청을 거절하고 다른 것과 교제하는 모든 자는 영벌의 불행을 예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우리는 누구와 사귀고 입습니까? 하나님 입니까, 세상 것들입니까? 물론 우리의 사귐의 대상은 분명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이실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말로는 하나님과 사귄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 명예, 권력, 자아, 지식, 외모, 인기 등과 더 깊은 교제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영적 간음입니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교제하면 불륜이고, 음부라는 정죄를 면할 수 없듯이 성도가 신랑되신 하나님을 두고 다른 무엇과 사귀거나 더 사랑한다면 정죄를 받고 영원한 형벌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신부 된 우리가 하나님 보다 다른 무엇을 더 사랑하여 사귀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위하여 독생자까지도 십자가에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우리를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귐은 우리로 영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의 사귐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신랑되신 하나님은 우리와 내밀하고도 깊은 사귐을 원하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여 심판 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여야 하겠습니다.

 

3. 참 기쁨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필연적인 선물입니다.

4절에 보면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의 서두는 생명의 말씀으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즉 본절의 의미는 생명의 말씀이 주어진 자들에게 기쁨은 필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성도들의 기쁨은 필연적일까요?

첫째, 기쁨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시편104편에 보면“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 하실지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십니다. 따라서 세상을 향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하나님의 기뻐하심의 최고 절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대상자이며, 선택받은 우리들이 기뻐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창조주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피조물도 기뻐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쁨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24절에 보면 성령의 열매로서 희락이 나옵니다. 마음에 거룩한 영이신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기쁨을 소유하고, 삶에 그 기쁨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참 포도나무와 가지’비유를 통해서 성도들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때에 우리 안에 충만한 기쁨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쁨은 세상의 기쁨과는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기쁨은 현세적인 자기 만족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쁨은 하늘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에게 있어 세상에서의 행복과 불행은 기쁨의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들이 구원의 기쁨과 고난의 기쁨을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어느 날 밤에 강한 태풍이 불었는데, 어린 딸은 밤새 잠을 설치고 일어나 아버지께 물었습니다.  “아빠 어제 밤에 태풍이 심할 때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라고 묻자 그때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태풍 가운데에서도 아침을 만들고 계셨을거야" 우리는 삶의 길목에서 고난의 태풍을 만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아침을 준비하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고난 역시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이 기쁨을 결코 잃어버리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관해서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또한 영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요한 사도는 생명의 말씀이라 불리우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듣고 만졌기 때문에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개인적으로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깨달을 때에 우리의 기쁨은 충만히 채워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이는 인간이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복음을 듣는 일에 매일 성실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인간사에 있어서 최대의 기적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찾아오신 성육신입니다. 이 엄청나고 놀라운 성육신을 우리가 깨달아 알고 믿게 하여주시는 것 또한 기적입니다. 그 기적으로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감격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그보다 더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하나님이신 에수 그리스도께서 벌레와도 같고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우리와 사귀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조 불구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하나님을 만나기를 거부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랑은 곧 심판이고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희들도 이 같은 사실을 잘 깨달아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기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사귀어 살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을 받아 누리며 기쁘고 즐거운 찬양을 부르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에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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