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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3:2-5)우리가 악한 생각을 가질 때 그 위에 마귀가 역사합니다.

48:1~3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위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 아버지, 우리 대광 교회가 사람이 보기에는 비록 작은 교회이지만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성전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는 주님의 전을 사랑하고 주님의 전에서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저희가 교회에서 해야 하는 일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임을 깨달아 온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요한복음 132-5.

1. 우리가 악한 생각을 가질 때 그 위에 마귀가 역사합니다.

2절에서 마귀가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을 팔 생각이 없었는데

마귀가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해석에서는 예수를 팔려는 생각은 가롯유다 자신의 생각이라고 합니다.

유다 자신이 예수를 팔아 돈을 챙기려는 악한 생각을 한 것이고,

다만 마귀가 역사하여 가롯유다의 악한 생각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해석했습니다.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마귀가 주는 악한 생각을 가롯유다가 실행하였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내 마음이 전혀 내 마음 같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도저히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귀에게 이끌려 살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언제나 착한 생각만 하면서 살지 않습니다. 때로는 악한 생각도 합니다.

그렇지만 대개는 그런 생각을 하다 가도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 생각을 버립니다.

하지만 그 순간 돌이키지 않고 계속 악한 생각을 하면 마귀가 역사하여

그 악한 생각대로 행동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악한 생각을 주고 양심을 굳게 하고 이 모든 것이 바로 마귀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한 생각에 물들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워져서 선한 생각을 하면 마귀는 나를 넘어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약화되어 있을 때 마귀는 틈탑니다. 마귀가 악한 생각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험하고 악한 세상에서 언제나 선한 생각만 한다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인간의 심령은 원죄로 인하여 부패하여 근본적으로 악한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악한 생각이 들 때 즉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더 이상 악한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마귀가 역사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악한 생각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은 마귀를 자기 마음속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롯유다와 같이 주님도 배신하고 마침내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우리의 생각을 늘 말씀으로 지킵시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하고 깨어 기도하여 마귀의 생각을 차단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야 합니다.

3절과 4절은 사람에게 가장 큰 감동과 함께 신선한 충격을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셨음을 아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왕권과 함께 앞으로 해야 할 일체의 일을

모두 주님에게 위임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전권을 예수님께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왕권과 재량권을 위임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어떤 모습을 보이고 계십니까?

악한 왕은 권력을 쟁취하면 백성들 위에 군림하고 압제하며 섬김과 높임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만왕의 왕이시고 만주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은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4절에서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마치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듯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종처럼 피조물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수건으로 딱아주신 것은

정말 감동적이면서도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때까지 세상 권세자 중 누구도 이와 같은 일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선한 왕이 평민의 복장을 하고 궁궐 밖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기는 하였지만

왕이 신하의 발을 씻겨 주는 일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섬김의 본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20:26,27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상 이치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세상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는 이유가 섬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높은 지위에 올라 갈수록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노력한다면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섬기려고 힘쓴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것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섬김을 본받아 우리도 더욱 낮아진 모습으로 세상 사람들을 섬김으로 예수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 갑시다.

 

3.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절정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결코 우연히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 속에 포함된 계획이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타락한 인류를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세우신 계획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신자들이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발적으로, 또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발생한 일이라고 하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축소하고 예수님이 구속주 되심을 부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들의 말처럼 우연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았어야 했는데 인간적인 공명심이나 부주의함으로

그냥 올라갔다가 반대 세력에게 붙잡혀 죽임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너무도 분명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의적으로 감당하신

하나님의 인류 구속 계획의 핵심이자 절정이며 완전한 성취입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없으면 모든 인류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인류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고전1:18).

 

4.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을 따로 정해 놓지 않으십니다.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시작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은 과연 열두 제자 가운데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발을 씻겨 주신 사람은 누구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분명 베드로는 아니었습니다. 

6절의 기록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구였을까요?

나이 어리면서도 주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그래서 ‘사랑하시는 자’ 로 불리워졌던 사도 요한이었을까요?

물론 이러한 질문은 어쩌면 쓸데없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누구도 차별하거나 특별 대우를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시는 마지막 만찬석상입니다.

더구나 예수님의 이 발 씻김에는 대단히 심오한 영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과연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에 누구를 가장 먼저 씻기셨는가를 질문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해 초대 교회의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은 가롯유다의 발을 가장 먼저 씻기셨을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했습니다.

그리고 이 견해에 대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공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자일수록 더욱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와 같은 추악한 죄인을 위해 십자가까지 지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를 증거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장 먼저 가롯유다의 발을 씻겨 주셨으리라는 추측은 아마 거의 틀림없는 사실 일 것입니다. 아니 씻겨 주시되 가장 정성스럽게, 그리고 눈물겨운 심정으로 씻겨 주셨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롯유다에게 베푸시는 사랑은 그것이 마지막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후에 그가 가장 비참한 종말을 맞을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누군가 사랑할 자격이 있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을 자격이 없기에 더욱 깊은 사랑으로 안아 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사람들이 변화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은 사랑할 대상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신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누구에게 있는지

찾지 말고 그 대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지 말고 먼저 섬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섬기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이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의 마음을 장악하여 범죄하지 못하도록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 우리 주변에는 마귀가 얼씬도 못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기듯이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게하여 주시옵시고,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선택하여 가려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위의 불신자라면

누구라도 가리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