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50:10~12 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드리는 수많은 제물들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이 외식적으로 바치는 제물로 드리는 예배보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나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삶을 제물로 받기를 원하시는 주님!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주님의 이름만 높이기를 원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새벽예배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요한복음 13장11-14절.
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10절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란 말씀을 하신 이유가 11절말씀입니다. 나아가 저자 요한이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란 표현을 본절에 또 기록하는 것은
제자들 가운데 깨끗하지 못한 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가롯 유다가 자기를 배신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줄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롯 유다를 제자의 무리에서 축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역시 아버지께서 작정하신 일을 완성하는 하나의 도구로 인정하셨기에 여전히 친절하셨고 아무 차별이나 내색을 아니하시고 친히 그 발까지 씻겨 주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놀라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예수님의 위대함입니다.
예수님은 가롯 유다의 실상을 아시면서도 여전히 그를 제자로 취하셨습니다.
자기를 배신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가롯 유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거나 모종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돌이킬 기회를 주기 위해 변함없이 그를 대하셨던 것입니다. 둘째는 인간의 이중성입니다. 가롯 유다는 지금까지 두 얼굴을 가지고 사람들을 기만해 오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외에는 감추어진 그의 모습을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은 그가 그만큼 완벽한 연기를 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스스로 낮아지사 친히 발을 씻겨 주시는 섬김을 제자들에게 보이실 때에도 그는 마음속의 악을 버리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회개의 기회조차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실상 악한 자나 선한 자로 자신을 가장하는 사단의 특성을 사단의 하수인인 가롯 유다는 잘 나타내 보여 주었고, 동시에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점도 확인시켜 준 셈입니다.
12.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12~17절까지는 스승으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파격적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직접 설명하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첫마디를 질문으로 시작하심으로써 그들 스스로 자신들을 성찰하도록 유도하셨으며 자신이 행하신 일의 의미를 깨닫도록 제자들에게 촉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이 행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일까요?
그것은 앞서 베드로와 말씀하실 때의 주제였던 영적 씻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섬김의 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질문하심으로써 베드로와의 대화 내용인 속죄의 의미에서부터 섬김의 도로 화제를 옮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행동으로 보이시면서까지 섬김에 대해 이같이 말씀하신 것은 당시 제자들의 심리적 성향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생각에 지배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과의 마지막 만찬석상에서까지 서로 누 가 큰가에 대한 다툼을 멈출 줄 몰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 어떠한 말보다 효과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는 다시 한번 그 행위의 의미를 설명하시고 이제 그들도 자신이 했던 것처럼 행하도록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우리로 보고 따르게 하기 위한 생의 지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따라 행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 예수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13.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자신을 부르는 ‘선생’ 과 ‘주’란 호칭이 정당한 호칭임을 확인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는 에수님과의 관계 성립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분이 누구이며 그분에게 있어서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자기 역할에 충실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들은 그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습니까?
그들에게 있어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선생’ 이었으며, ‘그 주님’ 이셨던 것입니다.
이는 단지 그들이 예수님을 존경한다는 의미 이상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선생님이며 주님이심을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구원의 길을 가르치 셨을뿐 아니라 친히 구원을 실현하신 유일한 선생님이시며 그들의 인생의 유일한 주님이셨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이와 같은 분이었기에 자기 인생을 위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간혹 보여준 불신앙과 연약함을 이유로 그들의 신앙을 형편없이 깎아내려서는 안됩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할지라도 그들은 주의 선택된 사도들이었고,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것은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임하실 때까지 이것이 유보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제자들이 가졌던 믿음을 우리 또한 가지고 있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날마다 상고하면서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라야 할 것입니다.
14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의 상황을 초월하는 참으로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찾아가지 스승이 제자를 찾아가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님은 직접 제자들을 찾아다니셨을 뿐만 아니라
손수 제자들의 발까지 씻기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1500년 이상이나 유대 사회를 지배한 전통적 율법관을 완전히 바꾸셨습니다.
유대인이 목숨처럼 여기는 안식일만 하더라도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처럼 여기는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 선포하시면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또한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은 있으나 구체적인 설명이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주님께서는 산상 수훈을 통해서 복 있는 사람은 배부르고 웃는 자가 아니라
주리고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선포하셨고,
본절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높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섬기는 자라고 선포하심으로
세상의 통념과 상식을 완전히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들도 세상의 통념과 기준에 휩쓸리지 말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통념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사람들이 되어야하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물질 만능주의로 물질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은 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 신앙으로 주님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시는 분임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자신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가지만 결국은 실패를 만나게 되며,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살아갈 때 인생의 성공을 만나게 된다는 것과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사는 것이 복이 아니라 예수님을 위해 고난받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으로 크고 복된 자라는 사실을 증거함으로써 이 세상에 거룩한 천국의 모형을 제시하여야 하겠습니다.
14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34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 세족식의 자리에서 ‘서로 사랑하라’ 는 새 계명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성도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분명하게 밝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사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의 중요한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공관복음이라 하는데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시며 성찬식을 영원한 규례로 세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떡을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고,
또 잔을 주시며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 말씀을 성찬 예식의 근거 말씀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성찬식의 기록은 없고 대신 세족식의 예식과 새 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사복음서를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 예식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세족식을 섬김의 명령으로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찬식과 세족식 사이에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깊은 연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성찬식이 세례와 더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면 세족식은 십자가 피를 통한 죄씻음과 동시에 이웃과 세상에 대한 섬김이라는 실천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와 성찬이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외적 표현이라면
세족식과 섬김은 그러한 성례를 마친 성도의 구체적 삶의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어떤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명령과 성례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모습를 볼 수 있습니다. 세례와 성찬식은 매우 엄숙하게 거행하면서도 제직회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로 다투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세례와 성찬을 형식으로 만들어버리는 중대한 과실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떡과 잔을 나누는 성찬식을 엄숙하게 거행할 뿐아니라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기고 사랑하는 일에도 열심으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찬식을 통해 새 언약의 백성이 되고 서로의 발을 씻김으로 새 계명의 실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은 진정한 성례전적인 삶이 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거룩한 산 제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하나가 되어 거룩하고 경건한 삶을 살뿐아니라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예수님의 본을 받아 저희들도 섬김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우리 대광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공통체가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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