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8:13.14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
하나님 아버지 악한 원수 마귀는 저희를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저희를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찬송이시며 우리의 구원이 되셨습니다.
저희를 도우시는 하나님, 저희와 함께 하시고 저희의 연약함을 도와주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며 주님을 찬송하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요한복음 13장1-2절.
1. 우리는 모두 장차 세상을 떠나 돌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1절에서 예수님께서 유월절 전에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되었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실 때가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사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속하신 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인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 사명을 완수하시면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떠나 돌아가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다 돌아가야만 합니다. 누구도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때가 이르면 다 세상을 떠나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 인생을 나그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돌아가야 할 나그네 들입니다.
물론 우리가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게서 오셨으므로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본자리는 하나님 보좌 우편이어서 그 자리로 다시 돌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돌아갈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 로부터 왔습니다.
물론 우리의 육신은 부모로부터 물려 받았지만, 우리의 영혼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스가랴12:1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심령 곧 영혼을 지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인생이 죽으면 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장차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여도 팔십이라고 하였습니다.
칠팔십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입니다.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길게 느껴지지만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면 참으로 순식 간에 지나갑니다.
그래서 시인은 우리의 인생을 ‘일식간’ 이라 표현하며 하도 신속히 가서 날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영원한 삶을 생각할 때 칠팔십년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삶과 세상의 것들에 집착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자신이 언젠가 돌아갈 존재요, 이 땅에서의 삶이 지극히 짧다는 것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 땅에서 천년 만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인생의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는 잠시 이 세상에서 살다가
우리에게 정해진 때가 되면 모든 것을 놔두고 우리가 왔던 본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삶과 세상에 속한 것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골3:2에서 우리에게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결국 돌아가야 할 것을 깨달아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본향에서의 영원한 삶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즉 위에 것을 추구한 사람은 천국에서 영원히 복된 삶을 사는 반면,
땅에 것을 추구한 사람은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땅의 삶을 위해 땅의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더 많이 가지려고, 세상 것을 놓지 않으려고 아둥바둥 애쓰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선한 일에 나누어 주고 베풀어 주어 하늘의 상급을 많이 쌓으시는
지혜롭고 복된 인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2.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다시 1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이도, 가슴 뭉클한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여기서 ‘자기 사람들’ 이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좁은 의미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여기서 끝까지란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완전하고도 영원히 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는 사랑이며,
다함이 없는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누가 이러한 사랑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이런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들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요 변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가장 숭고한 사랑으로 불리는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도 한결같지는 않습니다.
그 사랑도 변합니다. 또 부부간의 사랑도 돌아서면 남이라는 말도 있듯이
매우 가변적인 사랑입니다. 또 주고받아야만 하는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영히 끊을 수 없는 사랑이며,
강권하시는 사랑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랑은 자기 희생적 사랑이며, 무조건적,
무제한적 사랑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사랑을 자기 사람들에게 베푸셨습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4. 5절),
그리고 이 사랑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로 주님의 이 사랑이 오늘 우리에게도 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심령이 둔하여 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 사도 요한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까지는
이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도 원숙한 신앙에 이르러 본서를 기록할 때 쯤에는
그 주님의 사랑이야말로 끝까지 변치 않는 사랑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만 열면 사랑을 외쳤고 사랑을 행하여 사랑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우리도 지금은 어린아이 같은 신앙으로 주님의 사랑을 미처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린 아이는 부모의 사랑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장성하여 자기가 부모가 되면 비로소 자기 부모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하여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최선을 다해, 무조건적으로 영원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순간에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이 잘못되는 것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곤경에 처할 때 즉각적으로 개입하셔서 우리를 도우십니다.
물론 때로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의 도우심의 방법이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이지
예수님이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예수님은 우리 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고 우리를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미 여러분에게 주신 천국 영생의 구원에 대한 확신에서 조금도 흔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섭리에는 인간의 지혜로 이해 못할 심오함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
고 하였습니다. 마귀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인 가롯유다의 마음을 빼앗아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결정타로 삼기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마귀가 얼마나 지혜롭고 간교한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배신한 것은 예수님을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로 만든 것입니다.
일반 성도 천 명의 배신도 제자 한 사람의 배신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제자도 믿지 못하는 가르침을 누가 믿으려 하겠습니까?
자신의 제자가 예수님을 구주로 여기지 않고 팔아버린 사람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그러므로 마귀가 가롯유다의 마음을 빼앗아 배신자로 만든 것은
마귀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훼방하고 핍박한 것 중에서 가장 큰 성과일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서 마귀로 하여금 가롯유다의 마음을 빼앗도록 허락하신 것은
대단히 큰 실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인류를 구속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결정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가롯유다의 악한 마음조차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롯유다로 예수를 배신케 함으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는 마귀의 생각은
큰 착각이고 오해였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통쾌한 역전승이었습니다.
마귀는 이 사건의 결과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영원한 멸망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의 심오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악인의 악한 행위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루어 가시기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심오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의 하나는 유대인들의 복음의 배척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구약 선민인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였다는 것은
인간의 합리적 사고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 복음을 배척하므로 인해 복음은 온 세계에 전파되었던 것입니다.
만일 유대인들이 복음을 배척하지 않았다면 복음은 유대인들만의 차지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교만과 편견이 복음을 배척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복음의 세계적 확산을 원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를 어찌 심오하다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모순되어 보이기도 하고 또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습니다.
성도의 고난도 그러한 이해하기 어려운 섭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의 섭리는 궁극적으로 선한 결과를 낳습니다.
곧 모순되어 보이고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는 곧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롬11:33,34에서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라고 찬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신앙의 길을 가다가 비록 내생각으로 이해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도 낙심하지 말고 선한 결과를 기대하며 끝까지 신앙의 길을 가야 하겠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믿음의 끈을 놓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오늘 새벽에 주신 말씀을 통해 다시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 않고 언젠가는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땅의 것을 사랑하지 말고 하늘의 것을 사모하고 천국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잊지 않고 주님만 의지하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하나님의 섭리를 때로는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나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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