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9:120- 내 육체가 주를 두려워함으로 떨며 내가 또 주의 판단을 두려워하나이다
내가 공과 의를 행하였사오니 나를 압박자에게 붙이지 마옵소서
주의 종을 보증하사 복을 얻게 하시고 교만한 자가 나를 압박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며, 죄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외하며 살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여,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에 언제나 올바르고 공정한 일을 행하므로, 악한 원수들로 인하여 곤경에 처하지 않게 하시고, 교만한 자들이 저희를 압제하지 못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마땅히 받아 누려야 할 모든 복과 은혜를 풍성히 받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2장1-3절.
1. 우리도 장차 주님과 함께 천국 식탁에 앉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셨으나
그로인하여 오히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습니다.
그로인하여 예수님은 유대인 가운데 들어나게 다니지 않으시고 에브라임 동네에 머물러 계시다가 유월절을 6일 앞두고 다시 베다니의 나사로 집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집에서 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와 마르다 자매와 나사로가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은혜에 감사하여 잔치를 베풀었던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드릴 음식을 준비하기에 분주하였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장면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기적과도 같은 상황입니다.
불과 며칠전만 하더라도 나사로는 죽을 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한시라도 빨리 오셔서 자신의 병든 몸을 고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므로 결국은 죽었었습니다.
잠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도 아니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나 장사를 지내어
무덤에서 시신이 되어 섞어 냄새가 날 지경에 이르러서야 예수님이 찾아오셨고
그 누구도 나사로가 다시 살아 나리라고 상상도 못한 상태에서 예수님이 살려 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어 예수님과 제자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사로가 죽은 것은 알고,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가 지금 이런 장면을 보았다면 기절초풍할 일일 것입니다.
만일 기절하지 않았다면 꿈인지 생신지 분간을 못할 것이고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은 아닌지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간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은 인류역사상
두 번 다시없는 사건 중의 사건이고, 상상이나 소설 속에서나 있을 법을 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상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한 사람의 꿈도 아니고 환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죽은 나사로 무덤에서 불러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나사로 가족만 본 것도 아니고
제자들만 본 것도 아니고, 나사로를 조문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만 본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대적자들인 유대 종교지도자의 하수인들도 그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요12:11에서많은 사람들이 나사로의 소생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우리들에게 참 소망이 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사로의 소생은 예수님 안에서 죽은 자들을 예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을 예표하기 때문입니다. 요11:25,26에서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마르다를 위로하시면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의 근원이심을 입증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언젠가는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지라도 다시 살고 또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즐거워하고 있는 나사로의 모습은
장차 우리의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육신의 병으로 죽었던 나사로가 예수님의 능력을 통해
생명을 회복하여 예수님과 함께 앉은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이지만 우리들 역시
장차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는 부활하여 천국의 식탁에서 주님과 함께 앉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열리게 될 천국 잔치에서 죽은 자와 죽은 자를 살리신 이가 함께 앉아
영원한 기쁨 속에서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나사로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놀라운 미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더욱 큰 기쁨과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를 살아갑시다. 비록 육신의 죽음이 우리에게 엄습해 올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영원히
가두지 못하며 결국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임을 믿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2. 마음과 정성을 드리는 것이 곧 참된 예배입니다.
3절은 마리아가 예수님을 위해 행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행한 일을 본받아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진정한 예배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나드 향유 한 근을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향유는 삼백 데나리온이라 하였는데,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일년 품삯에 해당하는 매우 값비싼 향유였습니다.
따라서 이처럼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예수님을 향한 마리아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어떠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으로 끝났다면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못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록 그 향유가 값비싼 것이라고는 하지만
이는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만큼 귀한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마리아의 행동은 사실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돈과 주님께 대한 약간의 열정만 있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전재산을 예수님에게 아낌없이 드린 것 보다 더 높이 칭찬할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향유를 붓고 난 후에 보인 마리아의 다음 행동입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수건으로 닦은 것이 아니라
자기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 준 것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성의 머리털은 그 여인의 인격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다는 것은
자신의 전인격을 예수님에게 드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헌신을 다 하였다는 의미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헌신을 진정으로 기쁘게 받으신 것은 값비싼 향유 그 자체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그녀의 마음과 정성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막14:9에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고 말씀하신 것도 그녀가 바친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드렸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온 마음과 몸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로부터 진정으로 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시간을 내어 예배에 참석하여 헌물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 앞에 예배 드리는 것도 귀하고 예물을 드리는 일도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마리아가 삼백 데나라온이나 나가는 향유를 예수님에게 아낌없이 부어드린 것 만으로도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과 정성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일주일 중 하루 그것도 한나절 정도 예배 드린 것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생각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돈의 전부도 아니고 십분의 일을 드리고는
자신을 드러내고, 자신을 주장하려고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시는 주님을 밤낮 불러서 찬양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 뿐이라는 찬송가의 가사와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되 오늘 본문에 기록된 마리아와 같이
정성으로 준비한 헌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중심과 온 몸과 마음을 드림으로써
하나님께서 흠향하시며 기뻐 받으시는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주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는 모습을 통해
저희들의 미래를 예측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저희들도 이 땅을 살아가다가 언젠가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에는 천국으로 이사하여
날마다 주님과 함께 살면서 영생복락을 누리게 될 것을 믿습니다.
또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씻어 주었듯이
저희들 또한 날 위해 십자가 지신 주님을 위하여 우리의 전인격적인 헌신과
날마다 드리는 예배와 찬송을 드리고 또 드려도 늘 아쉬운 마음으로 이 새벽에 나오신
주님의 백성들을 사랑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시옵기를 바라옵고 원하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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