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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한복음7:19~24주일은영과육이충전과회복하는날

1. 신앙 없는 종교 행위는 주님이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유대인은 일반 대중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원이며,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모세 율법을 가장 잘 지킨다고 스스로 자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율법을 지키도록 강요하는 철저한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을 향해 율법을 지키는 자들이 없다 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율법주의자들이 그 말씀을 받아드리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였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은 나름대로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율법을 종교 행위 로서만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 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정확히 계산해서 내고,

안식일을 철두철미하게 지켰다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일종의 종교 형식이었을 뿐,

거기에는 알맹이인 참된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의 사소한 규정은 따지며 지키고 있었지만,

정작 더 중요한 율법의 정신은 버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 생활에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행위가 필요합니다.

형식이 없이 내용을 담을 수 없듯이,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상당 부분 종교적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신앙은 예배, 헌금, 주일 성수 등의 종교적 행위를 통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헌금을 드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로서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신앙이 없이 표현될 때입니다.

예를 들면, 한 성도가 교회의 모든 예배를 빠짐없이 드립니다.

주일 낮 예배는 물론, 주일 저녁 예배, 수요 예배, 구역 예배, 새벽 기도회까지도 빠짐없이 참석합니다. 또 헌금에 있어서는 십일조는 물론, 때 마다 각종 명목으로 헌금을 드립니다.

주일이면 온종일 교회에 머물며 각종 봉사 활동을 합니다.

이런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전혀 신앙 없는 엉터리 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충격일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향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 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평가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것입니다.

신앙이 없이 종교적 행위로 그칠 경우에는 그 모든 열심과 노력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든 것일 수 있지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런 경우가 각 교회마다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 없는 종교 형식은 이토록 위험한 것입니다.

신앙과 종교 행위는 밀접한 상관 관계가 있지만 신앙과 종교행위가 꼭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주일 성수, 예배, 헌금 등이 외형적인 부분은 잘 행하면서

사랑이 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말씀 듣고 세상에 나가 실천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외형과 더불어 내면의 신앙이 잘 표현될 때에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을 준수하고, 헌금과 예배를 드리는 것이 내용 없는 종교 행위로 그치지 않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표현이 되도록 늘 전심으로 행해야 할 것입니다.

2. 안식일은 영과 육의 건강과 회복을 위해 주어진 날입니다.

20-23절에서 안식일 문제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지금 상황의 전개는 5:1-18의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안식일에 예수께서 병자를 치유하신 사건 때문에 안식일 규례를 중시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적대시하게 되고, 안식일 논쟁 과정에서 미움이 더욱 증폭되어 예수를 죽이려고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이에 본문에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 아니냐? 하시며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가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신 것 때문임을 상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안식일에 아무 거리낌 없이 할례를 시행하면서

왜 내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 만을 문제 삼느냐고 지적하시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안식일 문제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그들의 종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문제인 데, 안식일 규례 준수는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자, 유대인들은 곧 예수를 그들 종교의 틀을 파괴하는 위험 인물로 간주하고 미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의 실상은 안식일에 노동하는 것을 금지한 것이지 안식일에 병자 치유를 금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자 치유를 금지한 것은 사람들이 만든 유전일 뿐입니다.

만일 안식일 노동을 금한 율법 조항을 지키기 위해 안식일 병자 치유를 금한다고 하면,

안식일에 할례를 시행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라는 모순을 예수님이 제기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할례를 시행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듯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는 것 역시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율법으로 행한 반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은혜로 행하신 것입니다.

안식일 문제, 곧 오늘날의 주일 성수 문제는 단순히 주님이 구별하신 날을 지키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복 주시기 위해 만드신 날로서, 성도가 영육간에 강건함과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금지할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을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의

관점에서 안식일을 보고 또 그것을 위해 일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 교회의 주일은 엄밀히 말하면 안식하는 날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일날 교회의 봉사가 너무 과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좀 열심히 한다는 사람이라면,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성가대와 주일학교 교사와 기관 모임과 예배 참석 등에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주일을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 쯤이면 육체는 파김치가 되고 맙니다.

목사님들처럼 컨디션을 조정하면서 월요일에 쉴 수 있으면 다행이겠지만,

대부분의 평신도들은 바로 다음 날인 월요일에도 직장에 출근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예외없이 반복되는 그 생활 속에서 평신도들은 신앙 안에서조차 안식 다운 안식을 누려 볼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주일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안식은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잔다고 안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육체의 안식뿐아니라 정신적 안식, 무엇보다 영적인 존재로서 영적인 안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육체와 영혼의 문제를 칼로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상태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인 존재입니다. 따라서 육체의 안식과 영혼의 안식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도한 봉사활동으로 몸이 피곤하고 힘들면 말씀을 들어도 들리지 않습니다.

주일 예배를 경시하고 육체적 쉼 만을 누리려고 하는 것도 명백한 잘못이지만,

온종일 교회에서 힘겹게 봉사만 하는 것 역시 안식일 정신을 위배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봉사에 집중하다가 말씀을 놓치는 마르다보다 차라리 주일에는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고,

여력이 있다면 봉사의 일도 겸하는 지혜로운 주일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3. 외모에 기초한 판단이 온갖 편견과 오류를 낳습니다.

24절에서예수님은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의 판단으로 판단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또 다른 이유 중 하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외모를 보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미워하며 죽이려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학위도 자격도 없는 자가 월권하여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내용이 하나님 말씀과 일치하고 합당한지

검토하고 그 진위를 진지하게 따져 볼 의도는 애초부터 없었습니다.

또 병자를 고치신 일에 대해서는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는 외적 관점에서만 보았습니다.

단지 예수가 안식일을 어기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38년 된 병자를 기적적으로 고치신 표적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외모로 예수를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대인들이 외모로 예수를 판단한 결과 내린 최종 결론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고대하고 기다려 왔던, 그리고 마침내 오셨던 그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엄청난 오류를 범하고 만 것입니다.

외모는 그 사람의 일부를 나타내 주지만 전부를 나타내 주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생김새, 학별, 가문, 출신지, 재산 등은 그 사람에 대한 중요한 정보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인 것들은 한 사람의 일부일 뿐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학별은 실력의 일부를 나타내지만 그것이 곧 실력은 아닙니다.

생김새는 그 사람의 됨됨이의 일부를 나타내 주지만 생김새가 곧 인격과 성품은 아닙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외모만으로는 사람의 진면목을 다 알 수 없기에 외모로 사람을 판단할 때 편견에 치우치게 되고 심각한 오류를 낳게 됩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봐도, 초등학교에서 3개월만에 퇴학당했다면 세상의 논리로 볼 때 문제이지만, 그가 위대한 과학자 된 에디슨이라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키 작고 볼품없었으나 한 시대의 역사를 주도한 정복자 나폴레옹과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터를 닦았던 위대한 사도들의 상당수도 볼품없던 갈릴리 어부 출신들이었습니다. 외모는 사람에 대한 세상의 판단 기준입니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입니다.

곧 그 사람의 품은 생각, 정직성, 의에 대한 열망, 죄에 대한 태도 등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판단 기준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판단을 받는 자입니다.

따라서 공의로 판단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동시에 남을 판 단함에 있어서도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세상의 판단 기준을 따를 것이 아니라,

중심을 보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판단 기준을 따라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처럼 심판자의 입장에서 사람을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라,

외모에 치우치지 않고 그 사람의 중심을 보고 바르게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의 기준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지각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주일을 준수하고, 헌금과 예배를 드리는 것이 외형적인 종교 행위도 중요하지만,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의 표현이 되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시고,

저희들이 거룩한 주일을 지키되 영과 육이 쉼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힘을 얻어 한주간 세상에 나아가 승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사람의 중심을 보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