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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교회의 역할과 사명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단순히 교회의 사도를 속이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을 속이는 것이었다.

사도들이 그것에 속아 넘어갔다면 지금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하나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심어주는 것이고, 또 성령님이 그것을 문제 삼지 않고 쉽게 용서해 주셨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성령님을 속이려는 비슷하고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어

초대교회의 성장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사탄의 공격이 교회 내부에서 계속 되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교회 내에서의 죄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

초대교회 두아디라 교회가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의 교회로 주님으로부터 칭찬 받았으나

교회 내에서 여자 이세벨(음란, 음행, 간음)을 용납함으로 인하여 교회가 큰 환란 가운데 빠지고

그의 자녀가 죽임을 당하는 형벌을 피할 수가 없었다.

교회는 죄를 지적하고 죄를 책망하고 죄를 씻어내고 죄를 쫓아내는 역할을 하여야 한다.

17:9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그러면

성도의 죄와 허물을 아무 말없이 그냥 내버려 두어야 하나?

그것은 아니다. 죄를 범한 형제에게 충고해야 한다.

17:10 한 마디 말로 총명한 자에게 충고하는 것이 매 백 대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

그럼, 허물을 들어내지 말고 덮어주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드려야 하나?

범죄 한 형제가 그 충고를 받아 들여 진정으로 회개하였는데도 불구하고

과거의 죄를 자꾸 들추어 내어 거듭 말하여 공격하지 말고 그 죄를 덮어주라는 것이다.

범죄한 형제를 충고한답시고 비판하거나 정죄하면 되나? 충고와 비판과 정죄의 차이점은?

6:37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충고는 하나님 말씀으로 책망과 교훈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여 더 이상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이고 비판과 정죄는 내가 심판자가 되어 그 죄에 대한 벌을 집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범죄한 형제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 만이 하실 수 있다. 사람에게는 심판과 정죄의 권한이 없다.

왜냐면, 죄 지은 자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죄인이 죄인을 심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고 있을 때 가라지를 뽑아라 했나?

뽑지 말라고 하셨다. ? 뽑는다는 것은 심판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가라지를 뽑는 것은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시어 하실일이다.

교회의 사명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영적인 치료를 하는 곳이다.

교회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이 들어오는 곳이고 그 죄인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료하여

변화시켜 새사람으로 만드는 곳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으로 치료하지 않고 사랑과 용서만 강조하고 죄를 그대로 내버려두니

교회가 죄인들의 소굴이 되어 버렸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어 영적으로 거룩하고 정결하여야 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행실이 세상사람들보다 더 깨끗하고 더 도덕적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대로 살지 않아서 세상사람들보다 더 악한 일들을 하여

기독교 안티들에게 개독이라, 먹사라 하고 범죄 집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가 죄를 노골적으로 책망하면 부흥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교인이 잘못해도 덮어주거나 부드럽게 다루어야지 베드로처럼 직선적으로 책망하면

아무도 교회에 나오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책망하면 교인들이 떠날까 두려워 잘못을 보고도 말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교회가 죄를 용납하지 않을 때 능력이 있고 부흥이 일어난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어떤 희생을 치르고라도 과감하게 죄를 막아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교회 안으로 가만히 스며든 죄를 과감히 처리하고 사탄의 공격을 차단하는데

성공하자 큰 은혜가 뒤따른 것을 볼 수 있다.

5:12~14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일어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송하더라 믿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예를 들면 친구의 전도를 받고 교회에 나온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는 다 착한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신다고 가정을 해 보자.

그러면 그 새 친구가 술 먹고 담배 피우는 것을 지적하고 책망하면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하는가? 아니다.

그 친구에게 청소년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면 왜 안 되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성경말씀을 근거하여 그것은 죄의 시초가 되고 출발이 되고 근원이 된다는 것을 말하여

끊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의 사명이고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그 친구를 죄 가운데 내버려두어 멸망의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되어

하나님의 사명자로서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다.

그 친구가 술과 담배를 끊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면 또 다른 아이들을 전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내버려두면 그 아이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가 다른이에게 죄를 물들게 한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할지 모른다. 그럼 다른 예를 들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새 친구를 전도해 왔는데 그 친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새 친구니 예배 시간에 휴대폰을 만져도 내버려두고 예배 시간에 떠들고 장난쳐도 내버려둔다면 어떻게 되겠나?

예배 시간에 떠들지 못하게 하고 장난치지 못하게 하고 휴대폰 못하게 받아야 한다.

그러면 교회에 안 나오는데요? 어떻게 하든 교회에 나와야 말씀을 들을 수 있잖아요?

떠들고 장난치는 아이는 절대로 말씀이 들어가지 않는다. 만약 들어 간다면 변화 될 것이다.

예배 시간에 떠들지 않고 장난치지도 않고 휴대폰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이 들어 가지 않으니 교회 한 달을 다녀도 1년을 다녀도 주일학교 내내 다녀도

여전히 떠들고 장난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 그뿐인가? 자신이 떠들고 장난치니

전도해온 친구까지 말씀을 못 듣는다. 그러니 예배 시간에 떠들어도 장난쳐도 딴짓해도

선생님이 재제시키지 않으면 그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같이 죄를 짓게 된다.

그러니까 두아디라 교회가 여자 이세벨을 용납함으로 한 교인은 교회에 계속 나올지 몰라도

그 교인 때문에 다른 성도들까지 음란과 음행과 간음에 물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메르스 보다 더 전파력이 강한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초대교회 내에서 사도들이 과감하게 죄를 차단하고 사탄의 세력을 쫓아내 버리니 놀라운 역사가

사도들의 손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 당시 사도들의 표적과 기사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인가하면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똑 같은 일들이 사도들을 통해 일어났다.

5:15,16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의 그림자라도 누구에게 덮일까 바라고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므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하였다.

죄인 하나를 물리치니 수 많은 교인들이 몰려든 것이다. 그리고 그 교인들은 성도로 성화되었다.

누가 이렇게 하신 것이라고요? 성령님께서 하신 일이다.

교회가 부흥하고 싶으면 교회는 죄와 싸워야 한다.

개인이 축복의 삶을 살고 싶으면 죄를 이겨야 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죄를 물리치고 이기는 것은 사탄과 싸우고 물리쳐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고 축복의 길을 닦는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죄와 싸우지 않고 타협하는 것은 죄에 굴복하는 것이다.

성도가 죄에게 지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마귀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여러분 마귀와 친구하고 싶은가? 마귀는 우리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

마귀의 강력한 무기가 무엇인지 아는가? 거짓말하고 속이는 것이다.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인간은 언제부터 거짓을 배우는지 아는가?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거짓을 배운다.

아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습득한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것 역시 조상 때로부터 내려오는 멀리는 아담과 하와 때부터 내려오는 저주의 사슬이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그 아이에게 나타나는 거짓을 찾아낸다.

아이들은 단순하니 자신이 하는 짓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허술하여 금방 다 들어난다.

예를 들면 답지보고 숙제를 다 했다고 하고 오늘 할 공부를 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보면 금방 안다. 책이 깨끗하고 정확히 답에만 체크되어 있다.

수학 같은 경우 풀이 과정도 없다. 답지보고 적었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거짓말 한다.

그러니 어떻게 풀었냐고 물어보면 모른다. 그러면 결국 실토한다. 처음엔 절대로 혼내지 않는다.

답지보고 적는 것도 죄이지만 그것보다 더 큰 죄가 거짓말하는 것이다 말해준다.

그것을 영적으로 설명하고 다음부터는 절대로 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지막으로 기도해 준다.

기도할 때에도 아이를 혼내는 기도가 아니라 아이가 죄짓고 거짓말 하도록 만든

마귀를 꾸짖고 혼내는 기도를 한다. 그럼 아이는 죄책감에서 해방된다.

또 다른 아이는 거짓말은 아닌데 교묘하게 말하는 아이도 있다.

자신의 죄는 감추어 버리고 그것을 지적하고 혼낸 선생님이 때렸다고 고자질하는 것이다.

그 엄마가 평상시에는 우리 아이 잘못하면 혼내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자기자식을 혼내면 굉장히 기분이 상한다.

그런데 만약 내 아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때렸다면 이성을 잃어 버린다.

상습적으로 지각을 하였고 계속 지각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도 또 그날 무슨 잘못을 하여

지각을 하였다. 지각의 벌로 엎드려 팔 굽혀 펴기를 시키고 말려 했으나 선생님에게 대들었다.

그래서 엉등이를 두대 맞았다. 그런대 그것을 집에 가서 선생님에게 대든 것은 쏙 빼버리고

학교에서 청소하다 늦어서 맞았다고 자신에게 유리한대로 말하였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속인 것이다. 아이들 중에는 정말 자신의 부모도 모를 정도로 영악한 아이가 있다. 부모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쳐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아이는 그 저주의 사슬에 갇혀 고통과 괴로움의 연속의 삶을 살게 된다.

우리아이들이 죄의 종이 되고 죄의 노예가 되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말씀으로 가르치고 훈계하고 기도하여 변화시켜 주어야 한다.

아주 작은 거짓말이라도 절대로 애교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하면 안 된다.

남을 저주하는 욕을 하지 말고 마귀의 종 노릇 하는 거짓말을 하지 말고 싸우지 못하게 한다.

우리 아이들이 그 세가지만 철저하게 금해도 세상아이들과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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