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하나님 아버지, 악한 원수 마귀가 우리를 어둠 가운데 가두어 두려고 하지만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빛되신 하나님이 우리를 밝히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악한 마귀가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게 할찌라도 우리는 무서워하지도, 두렵지도 않습니다. 생명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보호하여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빛이요, 구원이시오, 내 생명의 능력이신 하나님을 오늘 이 시간에도 찬양하며 경배하오니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시고, 오늘도 크신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 화목케하는 중보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36-39절은 귀환하는 제사장들의 가계별 수효를 기록하고 있다.
바벨론의 침공으로 남유다의 많은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하였다(왕하25:18-21).
살아남은 제사장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 갔다.
그러나 그곳에서 노예로 사는 동안 제사장 가문의 명맥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기록된 내용에서 보듯이 몇천명으로 번성되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어 고국으로 귀환하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다.
이스라엘에서 제사장 직분은 가장 고귀한 직분이다.
제사장은 성전에서 제사를 인도하며 백성들을 중보하는 역할을 한다.
백성들이 범죄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졌을 때,
제사장이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제사를 드리므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징계를 피하고 용서를 받게 된다.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제사장의 사역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그 어떤 일보다도 귀중한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범죄한 레위인들을 멸절하지 않으시고 특별하게 보존하시고 번성시켜
이스라엘의 영적 부흥과 재건에 앞장 세우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누가 제사장 역할은 하나? 물론 교회의 목사들이다. 그런데 목사뿐아니라
벤전2:9에서는 성도들을 ‘왕 같은 제사장’ 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해서 그런 지위를 얻었나?
롬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교회에서 성도들이 전도하고, 구제하고, 사랑하는 것이 불신 이웃과 하나님 사이를 화목게 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제사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화목게 하는 일을 하는 성도를 보존해 주시고 번성케 해주신다.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를, 또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사역은 결코 쉽지 않다.
내 힘과 의지로 불가능하다. 중보자의 희생이 필수적이고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가능하다.
하나님은 아무나 그 귀중한 사역을 맡기지 않으신다. 그래서 힘들고 어렵지만 해야 한다.
제사장적 중보 사역이야말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이고,
교회의 부흥과 개인의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의 극치이다.
고후5:18,19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지금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아이들에게 매일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있다.
그 아이들은 자기 발로는 절대로 교회 가지 않을 아이들이고,
교회 가지 않고서는 복음의 말씀을 들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 수 없다.
우리가 하는 이 사역이 바로 아이들 상호간의 화목하게 하는 일이고,
아이들과 하나님과의 화목하게 하는 중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뿐만아니라 외가집의 모든 식구들과 친가의 모든 일가 친척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는 일은 결코 쉽지않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안듣는다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언젠가는 반드시 우리의 중보자의 역할에 빛을 보는 날이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기도를 멈추지 말고 말씀으로 권면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 한다.
2.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나?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사람.
43-58절은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 신복의 자손들 중 귀환자들의 가계와 수효를 기록되어 있다.
느디님 사람들이 누구냐하면 레위인을 돕던 성전 봉사자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들이었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당시 이스라엘에 항복하였던 기브온 족속이 최초의 느디님 사람들이었으며
이후 수많은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이방 족속들 중에도 느디님 사람에 가입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성전에서 물을 걷고, 나무를 패는 일을 하였다. 성전의 하인들이라 할 수 있다.
또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은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이라는 말이 아니라
솔로몬이 성전과 왕궁을 건축할 때 일군으로 징집된 이방 족속들의 후손들을 말한다(왕상9:20,21). 이들 역시도 전쟁 포로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복은 이스라엘에서 비천한 신분을 가진자들이었다.
이들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포로 귀환 때에 함께 귀환하였다.
보통은 그 나라의 노예로 있던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불만 세력이 될 소지가 많다.
그런데도 함께 귀환한 것을 보면 이들이 이스라엘의 불만 세력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낸다.
만일 이들이 불만 세력이라면 이스라엘로 귀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이스라엘 자손들과 함께 귀환하였다는 것은 그들 역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증거이다. 특별히 이들의 귀환자 수는 레위인의 귀환자의 수보다 많았는데
이것은 그들이 레위인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었고, 성전건축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는 신분이 높은 자나 신앙적으로 명망있는 가문의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 신분과 관계없이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는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고 성장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봐도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대부분이 어부 출신이었으며 세리, 죄인,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인들이었다. 당시 사회·종교적으로 신분이 높았던 자들은 오히려 교회의 대적이 되었다.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헌금을 많이 한다고 높여주고 특별히 더 기도해주면서
반면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헌금을 적게 한다고 무시하고 관심이 없는 것을 봐 왔다.
우리 이알이선교비전은 신분이 높은 자나 낮은 자나 상관없이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일을 위해 서로 하나가 되어 협력하도록 해야 한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행10:34,35)
교회 교역사로 사역을 하면서 일부 믿음이 없는 교인으로부터 나이가 많다고, 적은 교회 출신이라고, 학력이 좋지 않다고, 경력이 부족하다고 무시당하고 업신여김 당하기도 하였다.
그럴수록 나는 하나님 앞에 더 겸손하고 낮아져서 성도들을 섬겼다. 성도들 보다 더 부지런하게 일 하였고, 낮은 자들에게 더 다가가서 그들과 대화하고, 주의 종이라고 대접받지 않으려고 하였다. 나의 진심이 전달되어 나를 좋아해 주고 존경하는 성도들이 한 사람, 두 사람 늘어났다.
앞으로도 담임목사로서 사역한다 하더라도 초심을 잃지 않고 성도들에게 근엄한 체하고 목에 힘주고 섬김을 받으려고 애쓰지 않을 것이다.
3. 천국의 주인공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
61,62절은 그 소속이 분명치 않은 제사장 후손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제사장들 중에서 소속과 이름을 발견할 수 없는 자들로 그 출처가 불분명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민족보다 더 족보를 중시했으며 그것을 항상 기록하여 지파마다 보관하였다(대상5:17). 특히 제사장 반열에 든 자들은 더욱더 보계를 정확하게 간직하고 계승하였다(40-58절). 그러므로 본문에 기록된 자들이 제사장의 계보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은 그들이 제사장 직분을 중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그들을 부정한 자로 여겼고 제사장 일을 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들은 레위 지파 제사장 후손들이지만 그것을 증명해 줄 보계를 상실하였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들은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알고 제사장 직분도, 족보도 하찮게 여겼다.
이들은 팥죽 한 그릇과 장자의 명분을 바꾼 에서와 같은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이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인정받지 못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비록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주장하였지만 제사장의 일을 회복할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천국 문 앞에서 통과하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경우와 같은 것이다.
자신들은 스스로 성도고 목사라 주장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면 그렇게 된다.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성도만 생명책에 기록된다.
그 생명책에 등록된 성도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을 받아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주여주여 한다고 해서 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마7:21,22).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나?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구원의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주의 사명을 잘 감당하여 하나님의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들이 되어야 한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 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
(결론)
본문을 보면 제일차 귀환자들 가운데 과거 성전 봉사자들이었던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복들이 포함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사실상 이스라엘의 노예와 같은 자들이었다.
이들은 귀환하지 않고 페르시아 땅에서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귀환하였다. 이는 그들이 비록 자유를 포기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고 기쁨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지위는 우리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지켜야 할 고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귀하게 여기고 세상 것을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에는 정말 힘든 일들이 많다. 쉬운 일도 없고, 항상 즐급기만 한 일도 없다.
그런데 이 일 만큼 하나님의 칭찬과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을 일은 없다.
힘들지만 어렵지만 그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