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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도우시는 하나님(시편46:1~4)

1. 하나님은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와 큰 도움이 되십니다.

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편46편은 남유다가 멸망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구원받은 후에 드린 고백이다.

히스기야 시대에 남유다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공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예루살렘을 제외한 남유다 전체가 앗수르 군대에 의하여 초토화되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예루살렘 성마저도 수십만 앗수르 군대에게 포위되어

곧 함락될 위기에 있었다. 예루살렘을 포위한 산헤립의 장수 랍사게는

히스기아 왕에게 편지를 하여 속히 항복하라고 촉구하였다.

이제 남유다로서는 아무런 가망도 없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히스기야 왕과 예루살렘에 갇힌 남유다 사람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였다. 그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도 보통의 기적이 아니라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던 앗수르의 군대가 공격하면 성안에 갇힌 모든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날 밤 18만5천명이 몰살을 당하고 산헤립은 도망하였다.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스라엘을 도우셨기 때문이다.

37:33-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에 대하여 가라사대 그가 이 성에 이르지 못하며 한 살도 이리로 쏘지 못하며 방패를 가지고 성에 가까이 오지도 못하며 흉벽을 쌓고 치지도 못할 것이요 그가 오던 길 곧 그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대저 내가 나를 위하며 내 종 다윗을 위하여 이 성을 보호하며 구원하리라 하셨나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의뢰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와

큰 도움이 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위기는 항상 존재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도 다 연약한 존재다. 그래서 어려움을 만나면 의지의 대상을 찾는다.

사람들은 환난에 처하면 어떤 이는 돈을 의지한다. 돈만 있으면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어떤 이는 능력있는 사람을 의지하고, 어떤 이는 권력을 의지한다.

그러나 돈으로도, 능력자도, 권력자도 해결할 수 없는 환난이 있다.

사람의 힘이나 돈이나 권력 등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환난이 참으로 많다.

대지진과 홍수, 그리고 태풍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아무런 원인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수 없는 사람들이 쓰러져갈 때면

아무리 탁월한 의사라도 무력함으로 바라만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불가항력적인 환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고, 큰 도움이 되신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어떠한 환난이라도 극복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어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도 환난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는 백만 대군의 적군이라도, 무서운 질병도 쓰러뜨리지 못한다.

아무리 강한 사단이라도 우리를 망하게 하지 못한다. 육체는 멸할 수 있어도 그 영혼을 멸할 수는 없다. 또 하나님이 막으신다면 육체도 멸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기만 한다고 다 도우시지는 않는다.

환난 날에 하나님을 우리의 피난처로 삼기 위해서는 평상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배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말씀과 기도 생활도 하지 않으면서

위기를 만났다고 도움을 요청하면 하나님은 고생하도록 내버려 두신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한다.

그런 관계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어떤 도움을 요청해도 기쁘게 수락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깊은 신뢰의 관계를 맺은 자가 환난을 만날 때

피난처와 큰 도움이 되어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천지가 요동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2, 3절에서 시인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환경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두려워하지 않고,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다. 어떤 이는 밤중에 혼자 다니는 것을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천둥 번개만 쳐도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자신의 작은 허물이 들킬까봐 두려워한다,

어떤 이는 빌려준 돈을 떼일까봐 두려워한다. 요즘은 묻지마 폭행범으로 사람을 두려워한다.

이 세상은 얼마나 많은 환경들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지 모른다.

어떤 환경 가운데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다.

더구나 큰 홍수가 밀려오거나, 강력한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거나, 토네이도 같은 회오리 바람이 휩쓸어갈 때나, 불이 나서 온통 불바다가 되거나, 해일이 일어서 물이 육지로 넘쳐 흐르거나, 건물이 붕괴되어 내릴 때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두려움의 환경들을 말하고 있다.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여기서 ‘땅이 변한다’는 것은 땅의 형태가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땅이 옮기어지는 큰 지진을 말하는 것 같다.

또한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진다’ 라고 하였는데, ‘산이 흔들린다’ 는 것은 화산이 폭발한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흔들리는 ‘산이 바다 가운데 빠진다’ 라고 하는 것은 거대한 지각 변동이며, 상상할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환경을 말하는 것이다.

게다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논다’ 라고 하는 것은 바다가 큰 소리를 내며 파도나 모든 것들을 삼킬 듯이 거세게 몰아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지진과 해일이 덮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상황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3절 하반절을 보면‘ ...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라고 선언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아비규환으로 비명을 지르고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선언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1절에서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시며 환난 때에 큰 도움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는 자를 보호하지 못할 큰 재앙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나? 바울은 로마서8:35에서 “누가 우리를 그리 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라고 확신에 찬 선언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피난처시오. 환난 날에도 큰 도움이 되실 수 있는 하나님만을 의지한다면 우리는 더이상 두려움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 믿음의 위인들과 순교자들은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었다. 두려움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환난 중에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4절을 보면 시인은 한 시내가 있는데 그것은 나뉘어 흐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흐르는 시내는 하나님의 성,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장막의 성소’ 를 기쁘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4절은 앞의 2,3절의 두려운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평온하고 고요하고 아주 평화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즉 시인은 극적인 전환을 통해 두렵게 하는 현실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들의 안전과 평화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백성들은 분명 극심한 환난과 위기 가운데서도 평안을 누리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물론 하나님이 예루살렘 중에 임재하셔서 그 백성들을 보호하고 계시며 도우실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이 확신한 결과였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환난 중에서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무엇이 참 행복인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서도 행복할 수 있는 것이 참 행복이다.

어떤 평안이 참된 평안인가? 평안할 수 없는 가운데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이 참 평안이다.

어떤 기쁨이 참 기쁨인가? 기뻐할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이 참 기쁨이다.

본시의 표현대로 세상은 요동한다.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떨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두려워 아니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에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이 표현에서 우리는 그런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한 시내’ 는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물줄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이 생명의 물줄기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복되고 좋은 것들’ 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그 생명의 물줄기가 지금 어디로 흐른다고 하나?

바로 ‘하나님의 성 곧 지극히 높으신 자의 장막의 성소다.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장막의 성소’ 로 묘사되고 있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소에는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하여 세운 자가 아니면 들어갈 수 없다. 결국 이는 하나님의 백성의 안전을 노래 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환난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보존되며 그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평안함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구약 시대에는 예루살렘이 하나님의 입재의 자리였고,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였다면 오늘날에는 성도인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임재의 자리다. 성경은 우리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하고 있다(고전6:19). 우리는 성령이 임재하여 계시는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처소가 불의한 자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신다. 결국 성도들은 환난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안전하게 되며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16:33“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만 가진다면 어떤 환난을 만나도 평안함을 누릴 수 있다. 우리가 여전히 두려워하고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신앙이 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 평안함을 누리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