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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5:1-2)예수님은 참 포도나무

64:5~10 저희는 죄악을 도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저희를 쏘시리니 저희가 홀연히 살에 상하리로다. 이러므로 저희가 엎드러지리니 저희의 혀가 저희를 해함이라 저희를 보는 자가 다 머리를 흔들리로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의인은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한 행동이 나에게 돌아오는 것을 경험합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선이 내게 복이 되어 돌아오고,

악을 행하면 내게 화로 돌아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마귀의 종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말과 혀로써 공격합니다. 거짓말로 공격하고, 모함하고, 비방하며 공격합니다.

그래서 악인의 공격으로 의인이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의인을 어렵게 한 악인은 자신의 악으로 저주를 받지만, 의인은 잠시 힘들다가 곧 회복되어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을 자랑하고 높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악인의 공격에도 흔들리지 말고 일관된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선을 행하고 덕을 쌓고 축복을 선포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51-.

15장은 13장에서17장까지 넓게 보면 ‘다락방 강화’에 포함되며,

그리고 14장에서16장까지 좁게 보면 예수님의 고별 설교에 해당됩니다. 

15장에서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 그리고 사랑과 인내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전반부에는 예수님과 성도와의 관계를 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비유하셔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포도원 농부에 비유하셔서 상호간의 연합 관계를 나타내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농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신 것은 구약 성경에도 있습니다

80:8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그리고, 2:21장과, 15장과, 10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포도원에 심고 가꾸신 포도나무와 같았습니다. 

하지만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대와 달리

좋은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하고 불량한 들포도나무로 변질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시고,

불순종하고 타락한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께 온전한 순종과 헌신을 바친 예수님을

새 이스라엘의 모범으로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포도나무의 가지로 비유하시어

그들이 참 포도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생명적 연합을 이루게 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영적 열매들을 삶 속에서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절대로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없으며,

오직 예수님 안에 거할 때만 영적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럼 이 본문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어떤 영적 진리들로 은혜를 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참 포도나무이십니다.

1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에, 하나님을 포도원을 가꾸는 농부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는 구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에 비유하신 것은

포도나무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그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여,

새로 심기운 바 된, 예수님 만이 그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농부가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포도나무를 심는 목적은 좋은 재목을 얻기 위함도 아니고, 조경수로 사용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포도나무는 좋은 재목이나 조경수로는 사용할 수 없는 지극히 볼품없는 나무입니다.

좋은 목재나 조경수로 사용할 목적이라면 포도나무는 가장 쓸모없는 나무가 될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도 볼품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가 만들어 내는 열매는 엄청납니다.

포도 열매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을 줍니다.

그래서 포도나무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행복과 소망의 상징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농부들은 포도나무를 심고 귀하게 여겨 가꾸는 것입니다.

하지만 포도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런데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러한 포도나무로 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은 모든 세상 민족 가운데 연약하고 볼 것 없는 민족 중 하나였습니다. 

그들은 당시 애굽의 노예 생활을 하는 민족이었고 특별한 문명이나 학문도 갖지 못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직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에 근거하여

그들에게서 융성한 열매를 기대하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선민으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셨습니다.

그들에게 다른 민족이 갖지 못한 율법을 주셨고 때마다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으며

적절한 시기에 여러가지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대로 풍성한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우상숭배, 외식, 형식주의와 같은 들포도만을 맺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 드리기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농부이신 하나님은 그들을 포도원에서 제하여 버리셨습니다.

그리고 한 새로운 포도나무를 심으셨는데, 그 포도나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초라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포도나무와 흡사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 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실제로 예수님의 외모는 잘 생기지도 않으셨습니다. 가진 것도 없었고 학문적 배경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기대하신 아름다운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들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아름다운 열매들을 풍성하게 맺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셨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 수많은 생명의 열매들을 맺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참 포도나무” 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 선언은 오직 주님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으로 절망 중에 있는 세상에 새로운 소망을 주고 인간의 참된 가치와 기쁨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 안에 생명이 있고 기쁨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이 세상은 소망이 있고,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가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류에게 행복을 가져 줄 참 포도나무가 되십니다.

2. 신앙의 열매가 없는 성도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운명에 처해지게 됩니다.

2절에서 예수님은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가지’는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5절에도 예수님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가지’ 가 성도들인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2절 말씀은 성도라고 불리는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들도 있을 것임을

시사해 줍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불린다고 하여, 또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고 하여

다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포도나무되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잘려 나가는 가지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한 멸망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오직 주님과 연합되어 있을 때에만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지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그저 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어야 그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줄기에 붙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지는 열매를 맺을 때 비로소 줄기에 붙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지 아니하고 줄기에 붙어 있기만 하면 오히려 열매 맺는 다른 가지에 피해만 입힐 뿐입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는 가차없이 제거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농부이신 하나님께서도 성도라 불리며 주님 공동체 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신앙의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 맺는 다른 성도들을 보호하고 또 더욱 실한 열매를 맺도록 그들을 제거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견인교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한번 택하여 구원한 사람을 다시 버리시지 않습니다.

이는 다만 성도인 체하면서 성도로서의 모습을 갖지 못하는 거짓 성도 가라지를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됨은 그 삶의 열매로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령의 열매,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참 성도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도라 불리며 주님 공동체 안에 속하여 있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아름다운 신앙의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신앙의 열매들은 무엇입니까?

먼저는 마3:8 회개의 열매가 있습니다. 또한 갈5:22. 23새로운 품성과 가치관을 덧입은 자로서 맺어 가야 하는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인내와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에게는 어떤 신앙의 열매들을 맺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러한 열매들을 우리의 삶 속에서 맺어 가고 있습니까? 혹 이러한 열매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까?

혹 잎만 무성하여 주님께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속히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아름다운 삶의 열매들을 맺어야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추수하실 때가 임박한 때입니다.

이때에 열매를 내지 못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책망과 징계가 따를 수 있습니다.

과거에 맺었던 신앙의 열매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는 매년 새로운 신앙의 열매를 맺어가시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희의 삶이

풍성하여지고 저희들이 예수님에게 붙어 있음으로 인하여 계속하여 신앙의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영혼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