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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4:25-28)성령이 하시는 일

63:1~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려 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내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인하여 내 손을 들리이다.

하나님아버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혼이 광야같이 메말라 있을 때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갈망하며 앙모하면

우리의 영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악한 마귀를 물리치고 평안과 안식을 얻게 해주십니다.

나의 생명 되시는 하나님에게 손을 들고 내 평생 찬양하며 송축하며 살기를 원하옵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425-28.

 

25.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지금은 비록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치고 계시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이 일을 대신 감당하실 것을 예언하시고 계십니다.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시는 새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신 상태에서 제자들과 함께 오래 머물러 계시지 않으실 것이라는 예고가 이 말씀 속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죽음의 시간을 바라보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시지만 제자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자를 비롯하여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여 주셨습니다. 첫째로 성령님은 ‘모든 일들’ 을 가르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님이 가르치는 교사로 믿는 성도들과 함께하실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진리의 영이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완전한 뜻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성령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맺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성령의 감화나 감동하심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일깨워 알게 하시는 것은 물론이고 주의 나 경고에 대해서도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한 필수 요건입니다.

둘째로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들을 ‘생각나게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계시지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계속 이 땅에 남아 있어 구원의 길을 보여 줄 것이며,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이 바로 성령님의 사역임을 보여 줍니다.

사도 요한이 본절에서 특별히 이 말씀을 기록한 이유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실 당시는 자신들이 예수님 말씀의 의미를 잘 깨닫지 못했으나 성령 강림 이후에는 그 말씀의 의미를 밝히 깨달았음을 기억하며, 초대 교회 성도들도 성령의 역사에 힘입어 말씀의 의미를 밝히 알게 될 것을 권고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오묘한 영적 진리를 바로 깨닫기 위해서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힘입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 아버지에게 가실 것이나, 남은 제자들이 마음에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밝혔습니다. 그 까닭은 바로 예수님께서 평안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에게 약속하신 엄청나게 위대한 선물입니다.

이 말씀은 성도가 누리는 평안을 끼치는 주체가 누군지 알게 합니다.

그것은 세상의 부나 권력을 가진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이 세상이 줄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완전한 평안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늘의 평안이라 하며, 신령한 평안이라 합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맛볼 수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권력자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평안입니다.

이와 같은 평화는 여호와 하나님에게서만 나오며 오직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투를 앞둔 기드온이 자기가 여호와를 위해서 쌓은 단의 이름을 ‘여호와 살롬이라 한 것은 평화에 대한 이스라엘의 인식을 잘 보여 줍니다.

‘여호와 살롬’ 은 ‘주의 평화’ 란 뜻이며, 악이 득세 하는 상황 가운데서도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며 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이 평안도 어떠한 분쟁이나 문제가 전혀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절대 평안의 상태가 된다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성도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동안에 분쟁과 문제가 따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이 평안의 원천이신 예수님께서도 많은 분쟁에 휩싸이셨고 심각한 문제들을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어떤 분쟁이나 문제들도 예수님의 길을 막지 못하였으며,

예수님이 하시려는 일들을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닥친 문제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평안이며, 최악의 위기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는 반드시 실현된다는 굳건한 믿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옥중의 베드로나 바울이 보여 준 태도에서 이 평안의 실체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안을 소유한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며,

죽음 앞에서도 평온한 천사의 모습을 보여준 스데반 집사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하는 평안, 외적인 환경에 좌우되지 않는 평안이 바로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도 허락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어 주님이 보내신 성령과 함께하는 사람들 속에는 이 평안이 항상 넘쳐나야 합니다.

그리고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어느 정도의 심적 상태냐 하면,

심장이 맹렬하게 뛰는 것과 같은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을 나타내는 의미로 자주 쓰였습니다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극도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에 빠지게 되는데, 실제로 제자들이그와 같은 상태에 놓여졌고 예수님의 당부의 말씀대로 하나같이 의연하게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이 세상은 언제든지 반그리스도적이며 반교회적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들에게는 마귀의 위협이 끊임없이 따르기 마련이므로

우리는 이에 대처하는 방법을 일고 있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안이 유일하고도 완전한 처방입니다.

이 평안이 있는 사람들은 외적인 환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으며, 생명의 위협을 당할지라도 주께서 명하신 일에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사도들과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못하게 위협하는 유대 당국자들의 살벌한 태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속에 세상이 알 수 없는 이 평안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인간적 측면에서 굳은 심지와 뛰어난 용기의 소유자들이어서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께서 주시는 평안을 얻지 못한 이들은 세상의 위협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주께서 주시는 평안이 무엇인지 모르며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주를 위해서 죽을 준비는 커녕 조그만 위협에도 근심하며 그 믿음까지 흔들리고 마는 것입니다.

28.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

본문에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라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에 대해 당연히 ‘기뻐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 곁을 떠나신다는 사실에 큰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며

이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당시 제자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사랑이 아직은 완전치 못하였음을 알게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이것을 지적하시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의 미숙함이

영적 지식에 대한 미숙함으로 나타났고, 또한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승천의

의미를 바로 깨닫지 못함으로써 슬픔과 근심 속에 빠지게 된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시는 것은 승천이므로 제자들로서는 기뻐해야 마땅할 것이지만,

그들의 사랑과 영적 지식이 아직 성숙지 못한 상태였기에

예수님이 떠나신다는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도 불안에 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떠나심은 비참한 죽음이 아니라 창세 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지셨던 영광으로

들어가시는 것이므로 마땅히 기뻐하며 축하할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는 것은 보혜사 성령을 통한 더 큰 축복이 주어질 계기가 되므로 제자들은 자신들이 경험할 영적 축복을 바라보고 기뻐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아직 이러한 영적 통찰력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들도 성숙한 신앙에 이르게 되는데,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목격하고는

큰 기쁨에 사로잡혀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자신보다 크시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 오해한 초대교회 이단인 아리우스파는 예수가 성부의 본질에서 낳은 자가 아니라 피조물 중에서 최고이고 가장 완전한 자라 하여 그 신성을 부인하고, 또다른 이단 유니테리언파는 삼위 일체성에 대한 정통 교리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단일적 인격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 이 말씀을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본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의 왜곡된 교리의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와 아들이 동일 본질이라는 사실은 성경에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가 자기보다 크다고 하신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성자 예수님이 신성이라는 증거이고, 또 하나는 아버지를 높이는 아들로서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체적으로는 동일 본질이십니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기능적으로 종속적인 입장에 계신다는 것뿐입니다.

성경이 일관성 있게 보여 주는 삼위 일체 교리 가운데 성부와 성자의 관계가 바로 이러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어떤 구절을 문맥을 무시하고 부분적으로 혹은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이나 신성을 부인하는 것은 모두 성경을 왜곡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가셨다가 오심으로써 제자들과 연합되어 하나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보혜사 성령을 통해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이 땅의 악한 권세로부터 모든 성도들을 지켜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통해 하늘의 권세로 보호받고 있는 자들답게,

그리고 언젠가 주님과 함께 하늘 보좌에 앉아 영원히 왕 노릇할 자답게 이 땅에서 당당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천국의 영광과 권세를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