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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요13:26-27)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50:22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 아버지 짐승도 제 주인을 알아보건만, 이 세상 사람들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도 몰라보고 예배하지도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하나님을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저희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부르고 감사로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507장 주님의 마음을 본받는 자, 요한복음 1326-27.

 

누가 예수님을 배반할 자인지를 묻는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26절에서 내가 떡 한 조각을 찍어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는 가롯유다에게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인지 물었는데 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은 않으시고

떡을 초에 찍어 가롯유다에게 주겼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가롯유다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스승을 배반하였지만

예수님은 당신을 배반할 제자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떡을 찍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에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순수한 마음과 거룩한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가롯유다는 그것을 깨달아 알지 못하고 끝까지 마귀의 길을 가므로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성도님이 세상적으로 물질적인 복을 받고, 하는 모든 일이 다 잘되면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총을 받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반대로 어떤 성도는 세상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하고 하는 일이 잘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복을 받는 사람은 스스로 교만해지기 쉽고,

반대로 고난을 당하는 사람은 원망불평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가롯유다와 같은 자에게 책망과 꾸중 대신

오히려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특별한 이유로 인해

약한 자,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자에게 다른 사람에 비해 더 큰 은총을 베푸시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남보다 더 큰 은총을 입고 있다고 해서

결코 자만하거나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고

힘들고 어려운 것 없이 평탄하게 살고 있다면 속히 자신을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잘못된 것이 있다면 속히 회개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육적인 복을 받기를 원합니까? 영적인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부분의 성도가 육적인 복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모두가 이 땅에서 잘되고 잘먹고 잘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으로 시작하여 육으로 끝나는 길을 걷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영적인 복을 선택한다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한다 하더라도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에게 매달리어 결국 영적인 복도 누리고 육적인 복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살면

이 땅에서 고생하고 힘들게 살고 평안이 없고 고통과 괴로움 가운데 살다가 일생을 마치게 되고 거기에다 예수님까지 믿지 않으면 영원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는 지옥으로 들어 가게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주를 위해 산다면 똑같이 고생하고 힘들게 산다 하더라도 영의 평안이 있고, 고통과 괴로움을 간혹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잠시뿐이고

결국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즐거움과 기쁨의 삶을 살 것이며 그로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며 영광 돌리는 삶을 살다가 죽어서도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우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눈에 보이는 물질을 위해 살지 말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말씀 따라 사시기 바랍니다.

나자신을 위해 살지 말고 나를 만드시고 나를 살게 하신 주님을 위해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통과 괴로움과 힘듦과 어려움속에 영원히 머물러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와 평안 가운데 살도록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한은 이미 13:2에서 마귀가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27절에서 사단이 그 속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그 순간부터 사단이 유다의 인생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음을 나타냅니다.

다른 성경에서 보면, 8:27 ‘군대라 이름하는 귀신이 어떤 사람 속으로 들어갈 때

그가 귀신에게 몰려 광야에서 짐승처럼 살게 되었다는 말씀처럼 많은 귀신이 들린 것이나,

5:13 많은 귀신이 돼지떼에게로 들어 가서 2천 마리나 되는 돼지들이 비탈로 내리 달아

바다에서 몰사하였다는 말씀처럼 귀신들이 돼지에게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사단이 유다의 속으로 들어 갔다는 것은

이제 유다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유다나, 귀신들린 당사자나 돼지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일입니다.

유다는 군대 귀신이 들린 사람처럼 해괴한 짓은 하지 않았으나

철저히 사단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었습니다. 사단은 유다의 생각이나 감정, 판단 및 결정 능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임의로 주관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의 말씀이 가롯유다의 막연한 배반 의사를 표현한 것이라면

27절은 그런 생각이 확정적으로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가롯유다에 대한 사단의 지배가 완전한 점령 상태에 이르렀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에 가롯유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배반의 길로 치달은 것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특히 주목할 사실은 27절의 ‘곧’ 이라는 표현입니다.

사단은 가롯유다가 예수님으로부터 먹을 것을 받자마자 지체없이 그의 속으로 들어가

그의 마음을 점령해 버린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단은 그동안 가롯유다의 마음을 느슨하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최후의 애정의 표시로 그에게 떡을 건네시자

사단 역시 이런 예수님의 사랑에 가롯유다의 마음이 흔들리거나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

신속하고도 완전한 행동을 취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처럼 예수님께서 친히 베푸신 거룩한 만찬장에 사단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 또한 놀랄 일이며, 이런 사단이 예수님께서 사랑과 애정을 담아 가롯유다에게 먹을 것을

건네시던 바로 그 결정적 순간에 결정적 행동을 취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상의 사실을 통해 사단이 역사하지 않는 곳은

이 세상 그 어느 곳도 없음을 생각하며 늘 죄와 마귀를 경계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성경은 다윗이 범죄한 일을 보면, 다윗에게 사단의 시험과 유혹이 가장 큰 때는

극심한 고난 중이 아니라 반대로 형통하고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역사를 봐도, 수많은 성도들과 교회가 넘어진 때도 박해의 시기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자유가 마음껏 보장되던 시대였음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단이 가장 신속하고 강력하게 역사하는 때는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더 크게 임할 때임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하나님의 축복이 가까울수록 더욱 깨어 근신하여

사단의 간계를 물리치는 영적 지혜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7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가롯유다에게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가롯유다가 마귀인 것을 아시면서도 제자로 택하셨고 돈궤를 맡기셨고,

다른 제자와 똑같이 말씀으로 가르치고 양육시키셨습니다.

뿐만아니라 스승을 배반하는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발까지 씻겨 주시며 극진한 사랑을 베푸셨고,

떡을 찍어 건네 주시어 끝까지 신뢰와 사랑의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가롯유다는 주님의 최후의 사랑마저 거절하고 완전히 사단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네가 하고 싶은대로 네 마음대로 하라’ 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가롯유다가 가야할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도록 내버려 두신것과 같이 가롯유다가 마귀의 하수인 역할을 하도록 내버려두신것과 같습니다.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1:26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가롯유다나 세상 사람들은 자유자가 아니라 사단의 종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진리는 진정한 자유란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의 지배와 간섭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간섭과 지배를 떠난 자는 자유인 같으나 실은 사단의 노예로서 갇힌 자, 눌린 자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에 있는 자는 부자유한 자 같으나 실상 자유케 하는 진리( 8:32) 속에서 최상의 자유를 누리는 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마치 자유를 아무런 간섭과 제지를 받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가출을 일삼고 어른들은 방종을 일삼다가 결국 질병과 범죄, 수치 속에서 비참한 결말을 맞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간섭하심에 대해 불평하지 말고 자녀 된 성도들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간섭을 더욱 귀히 여기며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그 어떤 법도 금하지 못하는 참다운 성령의 자유를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23).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육적인 복을 사모하지 않고 영적인 복을 사모하고,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고,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 근신하여 깨어 기도하고, 하나님 안에 살고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하고 참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늘 감사 찬송하며 살아가는 저희들이 되게 하 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