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24:15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 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나님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은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나라의 흥망성쇠가 주의 손에 달려 있고 인간의 생사화복이 주님에게 달려 있고 천국과지옥이 주님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며, 나를 만드시고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오늘 이시간에도 오직 주님만을 찬양하며 경배하며 영광 돌리오니 저희들의 예배를 받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신11:26~28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인간의 죄를 열거해보면 거짓말, 속임,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분리, 이간질, 비방, 비난, 욕, 폭력, 도적질, 살인, 등이다. 이런 죄들의 뿌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
(경찰관이 지켜보고 있는데 신호위반 하겠는가? 도둑, 강도, 은행털이 하러 들어가겠는가)
(교도소에 가보라)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만이 가득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고,
자기만의 우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이고, 그것은 마귀의 종 노릇 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은 여러분들에게 우상을 섬기면 어떻게 되는지, 마귀의 종 노릇을 하면
그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말씀드려고 한다.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제가 체험한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제가 중학교 때 ‘전설 따라 삼천리’라는 MBC라디오 방송에도 나온 이야기다.
옛날 우리나라 조상은 선비들이 많은 논밭과 산지를 가지고 있고 많은 종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가난한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고 폭리를 취하여 일하지 않고도 재산을 늘여나갔다.
저의 11대조 할아버지가 바로 경북 구미 선산에서 많은 논밭과 산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였다.
욕심 많고 괴팍하고 우리 신천강씨가 원래 성격이 사납고 거칠다.
하루는 중이 나의 11대조 할아버지 집에 시주를 하러 왔는데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 중이 가지 않고 계속 문 앞에서 염불을 하였다
그래서 쌀을 주기는커녕 쪽박을 깨고 두들겨 패서 쫓아 버렸다.
그 중이 10년 후 도승이 되어 다시 찾아와 앙심을 품고 계략을 꾸며 이렇게 속였다
안타깝다. ‘능산을 깎고 물길을 마을로 돌리면 자자손손 큰 인물이 날거다’
그 말을 믿고 그대로 했는데 큰 인물은커녕 골통 후손들이 태어나 점점 가세가 기울어져 갔는데
저의 증조 할아버지 때 와서는 술과 유흥으로 그 많던 땅도 다 팔아 먹고 완전히 망하였다.
방송을 아버지, 형, 저가 같이 듣고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저 이야기 우리 조상이야기다.
한참 후 막내 삼촌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선산 땅이 거의 우리 땅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의 할아버지는 한의사를 하시어 그런대로 부유하게 살았다.
그러다 6.25전쟁으로 피난을 가면서 재산을 다 날렸다.
그러던 중 할아버지께서 아침밥 잘 드시고 산책 나가시다 돌연사 하셨는데,
어머니를 평소에 너무 미워하시어 혹독한 시집살이를 시키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자 밥에 독을 넣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고 어머니에게 누명 아닌
누명을 씌웠다. 그 후부터 가족이 원수 지간이 되었다.
장손이신 아버지를 중간에 두고 할머니는 어머니를 끊임없이 트집 잡고 괴롭히고
어머니는 할머니에 대한 원한이 쌓이고 쌓이며 집에 분란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히 지옥과 같은 생활이었다. 마귀소굴과 같은 집안 환경이었다.
아버지는 서울대학교에 시험칠 정도로 엘리트였으나 하는 일마다 안되었다.
점도 처보고 무당 불러 굿도 해보고 별 것을 다해도 안되니 아버지가 생각하기를
그때 11대조상이 스님에게 못된 짓을 해서 우리 집안이 망했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일을 하지 않으시고 온 산마다 절마다 조상의 죄를 씻기 위해 불공을 드렸다.
중은 아니지만 불경 책을 보지 않고도 염불을 외울 정도였고
내가 어려서부터 집에서 하도 많이 들어 귀에 익고 입에 익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 말년에 귀신이 들려 말도 잘못하고 수년간 시달리다가 암에 걸리시어 돌아가셨다.
그런데 우리 집안이 망한 것은 중에게 못된 짓을 해서 망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고 선하게 살았다면 마귀의 저주의 올가미에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어머니의 고생은 말할 수 없었다. 나의 어머니 집도(외갓집)경북 구미 이문동의 거부였다.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외할아버지가 재혼을 하셨는데 콩쥐밭쥐에 나오는 계모가 들어왔다
어머니에게는 심성 곱고 착한 남동생이 있었다. 나중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모든 상속이 외삼촌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그런데 계모가 들어와 아들들과 딸들을 낳자
노골적으로 외삼촌과 어머니를 구박하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와 결혼 하시고 혼자 남은 외삼촌은 구박을 견디다 못하던 차에 6.25가 발발하고 학도병으로 자원 입대하여 전사하고 말았다.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계모인 외할머니가 모든 재산을 가로 챘다.
전처소생에겐 한 푼도 남겨주지 않고 자신의 아들과 딸들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악한 행동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가 없다.
어머니의 배다른 동생, 외삼촌도 배울 만큼 배웠으나 하는 일마다 안되고 실패하였다.
거기에다 외숙모도 귀신에 시달리다 아이 둘을 놔두고 목메어 자살 해버렸다. 10여년 전에 부근 땅을 팔아서 100억을 남겼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고 형님이 찾아갔으나 외삼촌이 돈 한푼도 주지 않았다. 자기 친동생에게도 1,2억정도 밖에 안줬는데 외조카에게 줄리만무하다.
왜 이런 불행들이 일어나는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할아버지도 외할아버지도 종손이었다.
종손들은 전통적인 유교 집안이어서 제사를 엄청나게 지낸다.
우리 집도 4대조의 제사를 지냈다. 고조내외분(3), 증조내외분(3), 할아버지(3), 설,추석(2)
그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제사를 지냈다. 외갓집도 마찬가지인데 거긴 제사를 두 번이나 지내었다
밤12시에 지내고 다음날 아침 먹기 전에 또 지내고 거의 귀신들과 같이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귀신을 섬기고 귀신과 가까이 했으니 망할 수밖에 없는 환경 이었다.
그래서 옛말에 종가집은 3대를 못 내려가고 망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그런데 막내로 태어난 내가 대학 때 예수님을 믿고 부모님에게 전도하여 아버지 어머니 두분 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돌아가셨고 아직 형제들이 믿음은 약하지만 온 가정이 복음화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형님이 장남이면서 종손이지만 제사를 중단 하였다.
그러자 삼촌들이 제사를 지낸다고 가져가고 인연을 끊고 사는데 지금도 비참하게 살고 있다.
지금도 친삼촌들과 배다른 외삼촌들은 제사를 지내며 저주의 사슬을 끊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을 멀리하고 귀신을 가까이 하면 육신적인 고통이 찾아 온다.
재물들이 사라지고 여러 가지 몸의 질병들로 고생하기도 하고 영적인 고통이 찾아와서
정신병으로 고통 받다가 폐인이 되기도 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폐가망신 한다. 이처럼 마귀는 끈질기고 집요하다.
그러나 마귀에게 벗어나는 길은, 저주의 사슬을 끊어 버리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방법 밖에 없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에도 대대로 유전적 질병들로 고통 받다가 죽은 사람이 있는가?
친족 중에 정신병을 앓다가 자살한 사람이 있거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는가?
하는 일마다 안되고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 살고 있지는 않은가?
그것은 우리 가문이 우상을 섬기거나 미신과 잡신들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적대적 관계에 있지 않은지 살펴 보고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1.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길을 가다 보면 여러 길이 나온다. 인생길도 마찬가지다.
이 길을 선택하느냐 다른 길을 선택하느냐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두 길을 동시에 갈 수 없다. 오직 어느 한쪽 길을 선택해서 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26절에서도 모세는 인생에게는 두 갈래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내가 오늘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 앞에는 복을 받는 길과 저주를 받는 길이 있으며, 인생은 그 두 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는 복과 저주라는 두 갈래 길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두 갈래 길 앞에 서 있으며 그 중의 한 길을 선택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너무나도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이 연속된 선택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택해야 할까요?
창세기 17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이 나옵니다.
롯은 비옥하고 풍요로워 보이는 길을 선택하였고, 아브라함은 양보의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또 룻기에 보면 나오미의 며느리들인 룻과 오르바의 선택이 나옵니다.
오르바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평안의 한 길을 택했고, 룻은 고난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택하여 시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잠14: 12)“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롯이 선택한 길과 오르바가 선택한 길이 하나님보시기에 바른 것 같지만 사망의 길입니다.
아브라함과 룻의 한 가지 공통점은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불분명한 상황에서도
세상의 욕심과 만족을 따라 선택하지 않고 믿음과 사랑의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일하게 선택의 기로에 선 인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습니다.
곧 선택의 갈림길에 설때마다 세상의 욕심을 따라서가 아니라,
신앙의 원리를 따라 선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7: 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이 말씀은 사람이 볼 때 그 길은 아니다 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맞다고 하면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마다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 항상 기도해고 선택해야 하며, 세상의 유익보다는 나 자신의 유익보다는 다른사람에게 유익을 주며, 믿음을 지키는 그런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에게는 축복과 저주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복과 저주를 두셨는데
그들이 복을 선택할 수도 있고 화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에 따라서 복을 누릴 수도 있고, 화가 임할 수도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축복과 저주를 선택할 기회를 부여하십니다. 우리는 언제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도 있고 또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져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을 택했으며, 이로 인해 에댄 동산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창3:23) .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도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불순종의 길을 선택했는데
이로 인해 그의 왕조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던 것입니다(삼상15:23) .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고 복된 삶을 살려면 무엇보다 선택을 잘 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놓치거나 잃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선택에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고 하셨습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좋은 직업을 가지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알면 인생을 실패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성공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좋고 배경좋고 모든 것을 다 갖춘 집에 태어나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면 인생을 실패하게 됩니다.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회는 자주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에 확실하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마25:1-13) 예수님의 열 처녀 비유 중에 나오는 어리석은 다섯 처녀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면 기름없는 빈 등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기름이 없다는 말은 성령이 없다는 말이고 성령이 충만하기 위해서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3. 복과 저주 사이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27, 28절에서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지만, 만일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쫓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복을 받든지, 듣지 아니하고 저주를 받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이것은 29절에서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에발산에서는 저주를 선포 하라고 명령하신 부분에서 더욱 명백히 나타납니다. 그리심 산과 에발산은 서로 마주보고 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기 위해 두 산에 각각 반으로 나뉘어 서야 했습니다(신27:12,13). 이는 축복이냐 저주냐를 반드시 선택해야 합니다. 축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은 저주를 선택했다는 말이고 저주를 선택했다는 말은 축복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결코 중립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여도 아니고 여도 아닌 중립이 있듯이 유교는 어느쪽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택하라 권하지만 그러나 영적인 영역에서는 중립이 불가능합니다.
의도 아니고 불의도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듣고 복을 받든지, 듣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아 저주를 받든지 하라는 것은
그만큼 여호와의 명령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삶의 방향을 내리라는 결단의 촉구인 것입니다.
(왕상18: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오늘 우리는 어떤 것은 순종하고, 어떤 것은 불순종하는 중립을 택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들이 어떤 때는 밝은 빛에 있고 어떤 때는 어둠에 있거나 어떤 때는 마귀를 따르고 어떤 때는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차지도 뜨겁지도 않는 미지근한 신앙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복과 저주의 영역에 중립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이왕 믿는 예수 확실하게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다짐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살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함으로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며, 저희가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희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신 어느쪽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집니다. 저희가 순종을 택하면 강성하게 되어 약속에 참예함은 물론 그 복을 장구히 누디지만 반대로 불순종하면 속히 멸망이 닥치게 되어 우리가 받은 약속이 아무 의미도 없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기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들을 공급하고자 준비하고 기다리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느 쪽에 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가 신뢰하고 순종할 때에만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양)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선택하여 걸어가고 있습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어떤 것을 순종하고 어떤 것은 불순종하고 있습니까?
육적으로 살지말고 영적으로 살아가자.
세상을 바라보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며 살자.
돈을 따라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가자.
욕심대로 살지 말고 진리대로 살자.
넓은 길로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자
내 뜻과 내 생각을 버리고 주님의 뜻과 주님의 생각대로 살자
(찬양) 주님을 보게하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다
아담의 길로 갈것인가? 가인의 길로 갈 것인가? 아벨의 길로 갈것인가? 에녹의 길로 갈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아담과 가인은 죄의 길로 갔지만 아벨과 에녹은 의의 길로 갔으니 우리도 의의 길로 가자.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하나님을 선택하라.
예배를 선택하고 말씀과 기도를 선택하고 봉사와 헌신을 선택하고 감사를 선택하고 전도를 선택하라. 우리의 자녀도 우리의 길을 따라 길과 진리와 생명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도록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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