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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복음서

새포도주는새부대에

오늘 본문 마9:14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항의 했습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금요일에 금식하는 전통을 만들어 지켰습니다.

그 전통에 따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였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금식을 하지 마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을 금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외식하고 형식적인 금식을 경계하셨다.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제부터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금식을 하였을까요?

원래 구약의 공식적인 금식은 하루뿐이었습니다.

민족적으로 회개해야 할 대속죄일은 모든 사람이 다 함께 금식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금식은 스스로 괴롭게 하는 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6:29~30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의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그날은 대제사장이 백성들의 죄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가는 중요한 날이며,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금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러한 금식의 근본적인 취지를 망각하고 형식적으로 변질되어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이런 책망을 받게 됩니다.

58:3-5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 금식을 어떻게 하였다는 것입니까?

금식의 날에 외형적인 모습으로는 머리를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고 금식하면서도,

그들의 행동은 오락하고 논쟁하고 다투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어찌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고 책망하시면서

그 금식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식적인 금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금식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참된 금식은 마귀에게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고, 죄에서 자유하게 해주는 것이며,

질병에서 치유함을 받게 하는 것이며, 굶주린 자에게 양식을 주고, 노숙자에게 잠자리를 주고,

헐벗은 자에게 옷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금식의 의미를 알고 하고 있으며,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비난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금식 교훈입니다. 금식은 신앙생활 중에서 중요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신약 성경에서도 여러 가지로 금식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신약은 금식이 성령충만 받는 방법이라든지, 능력 받는 방식이라든지

또는 기도 응답을 받는 수단이라고 결코 교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기 위해서 금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금식을 살펴보면 눅4:1~2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예수님께서 금식하신 후 성령 충만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성령 충만함을 입으신 후 금식하셨습니다.

금식이 신앙 과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 따라 순종하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즉 금식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방법입니다.

신약의 금식에는 두 가지 경우가 나옵니다. 즉 개인의 금식과 교회의 금식이 있습니다.

먼저 개인의 금식은 여선지자 안나의 금식입니다. 2:36~37절입니다.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십사 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안나는 84세를 넘긴 노인입니다. 그런 노인이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놀라운 일입니까? 안나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금식 기도한 것이지

세상 욕심이나 소망이 있어서 금식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만을 바라고 살다가 아기 예수님을 만나 뵙는 축복을 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 교회적인 금식입니다. 13:2~3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는 주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금식했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주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교회 최초로 선교사를 파송할 때 금식 기도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주님의 일에 금식하며 기도하여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를 세계 교회의 중심이 되도록 축복하셨다.

이처럼 주님을 일을 위한 금식, 주님을 섬기는 금식을 하면, 엄청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이것이 신약에서 가르치는 금식 교훈입니다.

우리도 안나와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을 섬기는 금식을 하고 주님의 일을 할 때 금식 기도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복과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라는

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금식은 참으로 중요한 신앙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을 때에 중요한 교훈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식의 때를 교훈하셨습니다.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는 금식하지 않아도 되지만 신랑을 빼앗긴 날에는 금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금식하라는 뜻이지만 그것을 영적으로

보면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가 금식이 필요한 때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하지 않을 때는 심각한 때이고 위험한 때입니다.

주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셔야 하는데 나의 죄로 인하여

주님이 함께하지 않으시면 실패와 좌절을 겪게 될 것이고 그때 우리는 금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연이어 16,17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여기에서 생베와 세 포도주는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을 의미하며

새 언약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교훈을 가리킵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교훈이고 구약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입니다.

새 부대는 새로운 언약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낡은 옷을 구약이라 하면 안됩니다.

구약도 언약이요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구약의 교훈을 유대주의와 장로들의 유전과 바리새인의 교훈들로 변질시킨 것이

낡은 옷이고 낡은 형식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금식 문제였는데

구약의 금식의 참 의미를 버리고 외식적이고 형식적이고 인간적인 연례행사로 치우치게 한 금식이

낡은 부대와 낡은 옷이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의 책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금식은 어떻게 하는 것 입니까?

3장에 니느웨 백성의 금식이 바로 참된 금식의 방법입니다.

니느웨 왕이 금식을 선포하여 백성들이 금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요나의 말씀 선포를 백성들이 듣고 먼저 금식을 시작하였고

그 소식을 접한 왕 자신도 보좌에서 내려와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아

금식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죄를 깨닫고 통회 자복하여 간절히 금식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습니다. 다윗이 자신의 범죄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이 죽을 때

하나님에게 살려주시길 바라고 금식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금식 기도 응답의 유무와 관계없이 그것은 참 회개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영적 근심에 사로잡히거나, 예수님 중심으로 살지 못하는 것을 깨닫거나,

어떤 중대한 문제가 생겼을때에, 하나님의 전적인 도우심이 필요할 때 금식하는 것이

생베와 같은 교훈이고 새 포도주와 같은 교훈입니다.

낡은 교훈과 같은 장로들의 유전, 인간적인 교훈, 잘못된 전통적인 교훈에 얽메이면 안됩니다.

예수님의 구약의 예언에 대한 성취적 교훈이나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라는 교훈과

생베를 낡은 옷에 붙일 수 없다는 교훈을 잘 살펴서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합니다.

금식은 오늘도 우리에게 필요한 영적 교훈입니다.

이 금식이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로 실행될 때 영적 유익을 얻게 됩니다.

58:6~11절 말씀을 마지막으로 찾아서 합독하시고 마치겠습니다.

6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이 예수님의 금식의 때와 방법과 금식의 참된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겨서 금식 기도하고

예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영적 문제가 생겨서 금식 기도할 뿐 만아니라

여선지자 안나처럼 안디옥 교회처럼 주님을 잘 섬기기 위하여 금식 기도를 하고

예수님처럼 하나님 말씀에 잘 순종하기 위하여 금식 기도를 하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금식 기도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는

금식 기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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