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인 반면, 타락의 본질은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1. 자기 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사탄의 타락과 인류의 타락에 관한 성경 구절을 보면
어떻게 자기 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 인가를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천사장 루시퍼가 타락하여 사탄이 되는 과정에 관한 구절이라고 이해하는
이사야14:12-15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내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사14:12-15)
루시퍼는 하나님의 가장 훌륭한 피조물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아래 거하는 삶으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위에 올라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했다는 말은 그가 더 이상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아래 있지 않고, 자신의 하나님이 되기를 선택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중심적인 삶에서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말합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루시퍼는 음부의 맨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타락에 관한 기록을 보아도 우리는 이 점을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3:1-6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1—6)
피조물인 사탄이 창조주인 하나님을 감히 대적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하나님께서 가족으로 창조하신 인간을 유혹합니다.
인간을 향한 사탄의 유혹은 선악과를 따먹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사탄은 그들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유혹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하와가 선악과를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하고 (하나님처럼)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게 보여 그 선악과를 따먹을 뿐아니라 아담에게 주어 먹게 했습니다.
여기에서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 즉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는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를 의미하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처럼 되기 원했다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되기를 선택한 것, 즉 자기 중심적인 삶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간타락의 기록을 보아도 자기 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입니다.
이사야 53:6은 인간의 타락을 무엇이라고 한 마디로 요약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이사야 53장은 인류를 구속하시기 위해 고난의 종으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서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6절은 인류의 타락을 한마디로 “그릇 행하여 각기 제길로 갔다”라고 요약하고 있습니다. 자기 길을 따르는 그것이 자기 중심적인 삶입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의식과 헌신과 희생이 가득해도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타락한 삶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이 타락의 본질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 속에 많은 종교적인 의식과 헌신과 희생이 있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타락한 삶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는 심지어 어떻게 번제를 드렸습니까?
시바에서 유향과 먼 곳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찌함이냐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제물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렘6:20)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꾀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렘7:24)
그 결과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2:13)
예레미야 시대 유다 백성들은 다른 많은 희생들에 추가로 심지어 시바와 원방에서 특별한 향품을 사다가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습니다. 시바는 오늘날의 남예멘 혹은 에티오피아이고 원방은 인도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철저하게 자기 중심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멸시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2. 자기 중심적인 삶과 세상과 사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중심적인삶, 세상 그리고 사탄은 삼위일체처럼 서로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1—3)
여기서 말하는 “그때”는 예수를 믿기 전을 말합니다.
이 구절이 말하는 불신자들의 삶의 세가지 특징은 이 세상 풍속을 좇는 삶, 공중의 권세 잡은자(사탄)를 따르는 삶,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삶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육체는 타락한 본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자기 중심성의 성경적인 용어입니다.
이와 같이 세상, 사탄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삶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문제는 이것이 불신자들의 삶의 특징인데,
많은 이들이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이러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 세상 그리고 사탄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배후에는 항상 사탄이 있습니다. 사실 자기 중심적인 삶의 원조가 사탄입니다.
다윗과 베드로의 예를 보면 이 점을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역대상 21장에 보면 다윗이 인구 조사하는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탄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대상21:1)
다윗은 그 동안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요 산성으로 삼는 삶을 살았습니다(시18:2)
그런데 이제 나라가 부강해지면서 그가 자기의 군대와 병력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인구조사로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구조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에서
자기 힘으로 사는 삶으로 바꾼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엄청난 죄였습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바로 사탄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6: 21-23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곁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마16:21—23)
예수님께서 이제 곧 다가올 죽음과 그 이후에 있을 부활에 대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행동한 것은 그가 예수님을 아끼고 사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위해서
기꺼이 목숨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나름대로 좋은 의도였으나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그 배후에 하나님의 계획을 대적하려는 사탄의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 가는데 있어 좋은 동기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좋은 동기만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베드로는 나름대로 좋은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이용 당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행동의 배후에는 사탄이 있습니다.
3. 자기 중심적인 삶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은 타락한 삶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습니다.
창세기 3:7-19을 보면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후, 하나님 중심적인 삶에서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한 후 그들에게 나타난 결과를 나타나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대로 그들의 영은 곧 바로 죽게 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 서로 부끄러워 자신을 숨길 만큼 부부 사이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할 정도로 정서적으로도 병들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육신도 결국 죽게 되었습니다. 자연계도 그들에게 비협조적이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모두 병들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의 모든 생명을 그들에게서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루시퍼가 자기 중심적으로 타락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루시퍼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했지만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타락 했을 때 그 결과는 지옥 맨 밑바닥이었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타락한 이사야 시대에 대해 하나님은
그 당시에 생명이 철저히 고갈된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곳이 없이 상한것과 터진것과 새로 맞은흔적 뿐이거늘
그것을 싸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1:6)
하나님의 생명이 고갈된 하나님의 백성의 상태를 성경은 “상처”라는 말을 사용해서 자주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사야 시대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터진 상처뿐이었습니다. 영적으로 그당시 이스라엘은 온몸에 문둥병이 퍼져 썩어가고 있는 상황과 같았습니다.
예레미야 2:13은 하나님을 무엇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예레미야 2:13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생수의근원”으로 자기 중심적인 신앙은 “터진웅덩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터진 웅덩이의 특징은 물을 저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거기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은 아닙니다
예레미야 12:1-2에서 “악한자”와 “패역한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렘12:1—2)
그들이 외부적으로 어떠했기에 예레미야가 시험에들었습니까?
예레미야12:1에 나오는“악한자”와 “패역한자”는 2절을 보아도 확실하게 알 수 있듯이
그 당시 유다 백성들과 예루살렘 거민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기에 하나님의 심판이 코 앞에까지 다가와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세상적으로 형통했고, 풍족하고 안락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과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 중 라오디게아 교회는 예수님의 칭찬을 한마디도 받지 못하고 오직 책망만 받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외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것과 벌거 벗은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예수님께로부터 칭찬 한 마디 받지 못한 라오디게아 교회도 세상적으로 매우 부요했습니다. 그 지역에 산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매우 부요했습니다. 자신들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부할 정도였습니다.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생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엄청나게 성장하는 많은 이단 교회들 그리고 엄청나게 부요한 많은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 속에도 하나님의 생명이 넘치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성도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부담 스러워합니다.
그리고 자기 중심적인 삶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는 어떠한 하나님의 생명도 없음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4.자기 중심적인 삶의 특징
자기 중심적인 삶은 하나님의 중심적인 삶과 정반대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힘과 능력으로 사는 삶, 자기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 그리고 자기 방법으로
사는 삶입니다.
자기 중심적 삶과 세상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곧 세상의 자원으로 사는 삶, 세상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삶, 그리고 세상의 방법대로 사는 삶입니다.
이사야 시대의 예(사30:1—3)
이사야 30:1-3을 읽고 다음의 물음에 답하십시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것이라
그 당시 앗수르가 유다를 위협하고 있는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북방 이스라엘이 바로 그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그 당시 유다는 잔인한 강대국 앗수르 앞에서 속수 무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아람과 가나안 지역의 작은 나라들이 그랬던 것처럼 또 다른 강대국인 애굽과 조약을 맺었습니다.
애굽의 힘을 빌려 앗수르를 견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에 대해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강력하게 책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용어가 얼마나 강한지 보십시오.
그렇다면 그렇게 절박한 상황에서 취한 유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왜 그렇게 큰 죄였습니까?
그 이유는 유다의 그러한 행동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의지한 행동(사31:1)이었고,
하나님의 방법을 따른 것이 아니라 세상의 방법을 따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신에서 나온 철저하게 타락한 자기 중심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은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된 삶입니다.
■ 우리는 자기 중심적인 삶에 익숙합니다
자기 중심적인 삶의 성경적인 용어는 육신입니다. 즉 자기 중심적인 삶은 타락한 본성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자기 중심적인 삶에 매우 익숙합니다. 타락한 세상이 다 그렇게 삽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으로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옛사람 즉 자기 중심적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순간 순간 자기 중심적 자세를 내려놓고 우리 삶을 성령께 드려 순종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살게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