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향하게 함
우리가 지니고 있는 지혜,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두 가지 부분으로 되어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그것이다.
이 두 지식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어느 것이 먼저 오며, 어느 것이 나중에 따라 오는 것인지를 분간하기가 쉽지 않다.
행17:28에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살며 기동하므로”,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곧바로 하나님을 묵상하는 데에로 생각이 옮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가진 그 모든 재능들의 근본은 하나님에게서 왔고, 인간 자신들의 것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안에서 생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뿐만아니라,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복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흘러내린다.
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찾아가다 보면, 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게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빈궁하므로 하나님에게 있는 복들의 무한함이 더 확연히 드러난다.
첫 사람 아담의 불순종과 반역이 후손인 우리에게 처참하고 황폐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을 수 없다.
배고프고 굶주릴 때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을 때에도, 두려움이 있을 때에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가 되었다.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없으면 온갖 부끄러움을 다 당하게 되고, 온갖 수치스러운 일들이 들어난다 자신의 불행을 의식하고 그 불행이 어디서 왔는가? 생각하면 자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달고, 찔림을 받아야 최소한 어느 정도라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 공허함, 빈곤, 연약함, 그리고 타락과 부패에 대해 느끼게 되고
이로써 참된 지혜의 빛과 건전한 덕, 모든 선의 풍성함, 그리고 의의 순결함이
오직 주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악한 것들에게서 자극을 받아서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 부족함을 느끼고, 연약함을 깨닫지 못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을 진지하게 사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의 재능에 만족하고, 자기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전혀 상관하지 않으면,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의 부족한 상태 연약함을 그대로 지니며 고통스럽게 힘들게 살면서도, 그 상태로 머물러 있고자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러므로,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자극시켜 하나님을 찾도록 해 줄 뿐 아니라,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2.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 자신의 진면목을 깨닫게 함.
반면 하나님을 바라보고 나서 자기 자신을 살펴야 자기 자신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불의함, 악함, 거짓됨, 부정함을 깨닫지 못하면
인간은 자기 자신이 의롭고, 올바르며, 지혜롭고, 거룩한 것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타고난 교만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판단의 표준이 주님이시다.
그런데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우리들 자신만을 바라보면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본성적으로 외식(~인 척한다)의 경향이 있어서,
의 그 실체가 없는 빈 껍데기 의 만으로도 얼마든지 만족하며 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마음과 세상이 부도덕에 오염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인간들은 원래 악하다.
그나마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악하지 않다. 내가 이 만큼이라도 착하니 되었다.
그것은 마치 완전히 검은색을 보고, 검은색에 힌 얼룩이 졌거나, 힌색 바탕에 거무스레한 반점을 보고 검은색 보다는 낫다하고, 나는 흰색에 가깝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실 우리가 정신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에서 얼마나 많이 속고 있는가 하는 것은
육체적인 감각을 통해서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밝은 대낮에 땅을 쳐다보거나, 건물이나 산이나 하늘을 보면 우리 시력이 좋다고 여긴다.
하지만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면, 밝은 빛 때문에 시력에 한계를 느낀다.
그러므로 우리는 태양을 바라보는 것과 다른 사물을 바라보는 시력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 우리의 영적인 가치들을 평가하는 데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땅 너머의 세계를 향하여 시선을 돌리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와 지혜와 덕으로 완전히 만족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 스스로 공연히 우쭐해지며,
우리를 마치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인 것처럼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높이 올려서 하나님께로 향하기 시작하여 그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고,
또한 그의 의와 지혜와 권능이 얼마나 절대적으로 완전한가를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따라야 할 표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이전에 거짓으로 의인 인것처럼 뽐내며 자랑하던 것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지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감동을 주던 것이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또한 우리의 열심의 모습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른 인간들에 비해 의롭다 생각한 우리는 하나님의 순결하심에 비추어 보면 새카만 죄 덩어리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다.
3.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인간의 모습
그렇기 때문에,성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때마다 항상 두려움과 놀라움에 휩싸여 완전히 압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상시에는 확고하고 든든하게 서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면 완전히 흔들려서 마치 죽음의 두려움에 휩싸인 것처럼,
벙어리가 되어 버리며, 하나님의 영광에 완전히 압도되어 거의 죽은 것처럼 되는 현상을 보게 된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위엄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절대로 사람이 자기 자신의 비천한 상태를 완전히 깨닫고 알았다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사사기와 선지서에는 이처럼 깜짝 놀라는 예가 무수히 나타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라”는 식의 표현이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 아주 흔하게 일상적으로 있었던 것이다(삿13:22; 삼손의 부모에게 나타난 하나님. 사6:5; 이사야에게 나타난 하나님. 겔2:1: 1:28; 에스겔에게 나타나신 하나님. 삿6:22-23 기드온에게 나타난 하나님. 등을 보라).
욥의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순결하심을 묘사하면서,
사람들을 압도시켜서 자기 자신의 우둔함과 무능과 부패를 깨닫게 하는 강력한 논증들이 항상 표현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참조. 욥38:1이하)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까이에서 바라본 후 자기가 티끌이요 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깨달았으며(창18:27),
또한 엘리야도 맨 얼굴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견디며 기다릴 수가 없었을 만큼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그렇게 위엄이 있었던 것이다(왕상19:13).
그룹들조차도 두려움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데(사6:2), 과연 썩은 물건이요(욥13:28) 또한 벌레(욥7:5; 시22:6)에 지나지 않는 인간은 더할 나위가 없다.
선지자 이사야가 말씀하는 것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그 때에 달이 수치를 당하고 해가 부끄러워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 왕이 되시고 …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라”(사24:23). 곧,하나님이 그의 광채를 드러내시고 그것으로 가까이 오게 하시면, 아무리 밝은 것일지라도 그 앞에서 어둠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사2:10,19).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할지라도, 올바른 가르침의 순서가 있는 법이므로, 우리는 전자(하나님)를 먼저 다루고 그 다음에 후자(인간)를 다루도록 할 것이다.
기도
저의 무능과 무지와 연약과 부족을 깨닫고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 부족함이 없으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고 기도하자.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판단 기준이다. 그러면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진다. 높아지려고 하지 않고 낮아지게된다. 이기주의 신앙이 아니라 이타주의 신앙이 된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예수님 닮는 삶을 살기를 다짐하며 기도하자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나를 위한 삶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 살기로, 사나 죽으나 주의 영광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며 기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