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께서는 준비 된 자(ERE)에게 기회를 주신다.
33절 “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왔다”.
‘때에’ 기드온이 아비에게 속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상을 찍어 불살라
‘여룹바알’ ‘바알에게 대항하다’ 라는 이름을 얻은 때,
기드온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여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는 신앙적인 준비되었을 때,
미디안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고, 기드온이 미디안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물론 다 하나님의 섭리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자에게 사역을 주신다.
하나님은 준비하게 하시고 준비가 완료되면 일하게 하시고 기도하고 일하면 역사 하신다.
요셉은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가 가정 총무와 옥중 사환을 하면서 신앙적으로, 행정적으로
충분히 총리를 감당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하신 후 총리가 되게 하셨고,
모세는 애굽 왕실에서 40년,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생활을 통하여 학문적, 군사적, 지리적, 신앙적으로 충분히 준비된 후 바로를 대면하고 출애굽하였다.
그리고 다윗, 사도 바울, 및 그밖의 사역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려면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준비되지 않으면 일할 수 없고 하더라도 실패하게 된다.
하나님은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주신다. 우리도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하나님이 사업을 안되게 하시고, 10년 이상 교회 사역자를 하다가 신학을 가고, 부교역자로 5년6개월 복무하였고 전도사, 강도사를 거쳐 목사 안수도 받았고, 개척할 장소도 준비되었고, 아이들도 다 보내 주셨고, 이제 때가 되어 일을 시작한다. 하나님이 역사하실 것이다. 기대하라.
2. 진정한 용기는 자기 의지의 실현이 아니라 자기 의지의 포기다.
34절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었다”.
기드온이 성령에 감동되어서 전쟁을 위해 군대를 소집하였다.
그러나 쉬운 상대가 아니다. 보통의 용기로는 불가능하다.
객관적인 전력을 비교해도 상대가 안된다. 숫자적으로도 미디안 연합군은 메뚜기의 중다함같이 무수하였다(5절), 또 막강한 전투력을 가진 자들이었다(3,4절). 미디안은 몰려다니면서 약탈을 일삼는 전쟁에 능한 자들이고 이스라엘은 농경과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다.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싸워도 못이길 것인데 300명만 출전하게 하셨다.
인간적으로 미디안을 물리칠 수 있겠나?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무모한 전쟁을 시작하려면 기드온에게 용기가 필요하다.
시드온이 전쟁에 임할 용기를 낼 수가 있었던 것은 바로 성령이 강림하셨기 때문이다.
성령이 강림하셔서 강권적으로 이끌어 주셨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기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기드온의 용기는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굴복하는 것이다.
진정한 용기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는 것이다.
결코 자신의 의지를 주장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나가는 것은 만용이다.
그것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인본주의고 오만이고 교만이다.
진정한 용기는 오직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을 힘입어 행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다.
인간적인 계산에 의한 생각이나 판단, 그리고 육체를 따르는
어리석고 불의한 의지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님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수 있을 때
진정 하나님 앞에서 용기 있는 자로 세워질 것이다.
우리도 목사가 되고 개척하는데 15년 이상이 걸렸다. 하나님의 때가 되었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데에도 개척하지 않고 편하게 청빙이나 바라는 것은 불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능력을 믿고 개척하는 것은 인본주의고, 만용이고, 교만이다.
3. 주의 사역에 신중함과 결단력이 필요하다.
36절~40절 기드온은 하나님께 자신이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 선택받았다는 징표를 보여 달라고 기도하였다. 양털에만 이슬이 내리고 사면의 땅은 마르고, 반대로 사면 땅에는 이슬이 내리고 양털에는 내리지 않는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였다.
이는 미디안과 결전에 앞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뜻을 확인해 보려는 신중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사자를 통하여 표징을 보여 주심으로써 확증해 주신(19-21절) 말씀을 과감히 행치 못하고 이처럼 다시 한번 표징을 구하는 것은 그의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신중한 것은 바람직한 것이다. 그저 감정에 치우쳐 밀고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신중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확증해 주신 말씀을 과감하게 행동하지 않는 것도 옳지 않다. 우리는 신중하면서도 과감한 결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불분명하면 신중하게 기도하고, 그 뜻이 분명하면 머뭇거리지 말고 과감하게 실행해야 한다.
(삼상23:1-5)다윗은 하나님의 명에 따라 그일라를 돕기위해 블레셋을 치려고 하자 사람들이 도망 다니는 주제에 왜 남의 전쟁에 끼여드나? 라고 반대하자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물어보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러나 두번째 기도에도 동일한 응답을 받고는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블레셋을 쳐서 대승하였다. 이처럼 다윗이 신중함과 결단력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귀하게 쓰임을 받았다. 이와같이 우리들은 언제나 신중함과 결단력을 가뎌야 한다.
신중하게 문제를 살피더라도 그 문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 행하기를 머뭇거려서는 안되며,
또 하나님의 뜻을 결단력 있게 행할지라도 자신에게 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미리 신중하게 살펴서 그 문제점들을 염두에 두고 대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역사하신다.
우리도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조금 안된다고 낙심하지 말고, 항상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면서 아침마다 아이들의 상태를 하나하나 살피고 기도하며 신중하면서도 결단력있게 나가면 된다. 이번에 집사님문제가 대표적사례다. 사람에게 끌려 다니면 안된다.
4. 징조보다 믿음으로 사역하라.
사실 기드온의 기도는 옳지만, 표징을 구한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때로는 표징도 필요하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체험하면 더 큰 용기와 힘을 낼 수 있으며, 당당하고 강해진다.
그리고 하나님의 간증꺼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간증자들이 암이 치유되거나, 죽을 수 밖에 없는 위기에서 살아나거나 엄청나게 크게 사업이 성공한 것을 간증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도 간증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이제 교회를 개척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보이신 이적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신기한 기적을 보여 주셨다.
학원생이 20명만 넘으면 개척하겠습니다. 하고 기도했는데 이미 작년 말녀 20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를 흩으시므로 개척하고자 마음을 먹었는데, 사모가 보이스 피싱범에게 모든 정보를 내어 주어 교회를 개척하기에 필요한 물품을 사기 위해 모아 둔 통장의 돈 200만원을 빼내가고, 알뜰폰도 4개나 개설하고, 다음날에도 더 정보를 빼 내갈 것이 없나? 하고 사모 폰을 원격조정으로 들어 왔다가 보이스 피싱범닝 줄 알게 되었다. 교회 개척을 앞두고 얼마나 큰 낙심과 상실감을 느꼈는지 모른다. 하나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게 되었는지 의문을 품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경찰서와 은행과 알뜰폰 회사에 신고하고 연락하고, 읍사무소에서 주민번호까지 바꾸었다.
그런데 한달 후 털린 계좌를 확인하고 보니 가상계좌로 빼내어 간 돈이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
경찰도 잡을 수 없고 은행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고 돈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보이스피싱범이 스스로 돌려 준 것이다.
보이스피싱범에게 받은 카톡에 “가져간 돈으로 몸에 나쁜 음식 사 드시지 마시고 좋은 음식 사 드시고, 꼭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아 천국 가세요”라는 문자를 보내었다.
아이와 아내가 그 문자 보이스 피싱범이 보지 않을 것이라 했다 나 역시도 그가 보리라 확신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그 문자를 보고 회개하고 돈을 돌려 주었다는 것 말고는 해석할 방법이 없다. 이런 신기한 기적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는 개척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실 역사를 기대하며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표징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눈에 보이는 표징은 참으로 불완전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완전한 믿음을 줄 수가 없다. 단지 일시적인 감동과 확신을 줄 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감동과 확신은 사라지게 되고 곧 또 다른 의심이 일어나며
그 의심을 해결하기 위한 또 다른 표징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가 만약 표징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국 그 믿음 전체가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서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던 출애굽 1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땅에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리신 하나님의 엄청난 재앙을 열 번이나 생생하게 목격하였으며,
또 광야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았고, 홍해를 육지처럼 걸어서 건넜으며, 반석에서 터져 나온 물을 마셨고, 또 날마다 내리는 만나로 배를 채웠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많은 기사와 표적을 보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원망하고 대적하여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모두 다 광야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표징은 사람들에게 확신을 줄 수가 없다.
그것은 단지 순간적이고 감각적인 확신을 줄 뿐이다.
눈에 보이는 표징은 진정한 표징이 아니고, 진정한 표징은 오직 믿음 그 자체뿐이다.
오직 믿음만이 그 어떤 상황과 형편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확신을 주고
그 확신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도마가 예수님 손과 발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던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며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하신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진실한 믿음을 구하자. 눈에 보이는 표징에 근거하여 우리의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을 눈에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통해서 보려고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분명하게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의심치 않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