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90장5-8절. 죄를 경계합시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드리겠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찬송가
시90장5-8절. 죄를 경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시31:1-5
(다윗의 시. 성가대 지휘자를 따라 부른 노래) 여호와여, 내가 주를 신뢰합니다. 내가 패배의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주는 의로운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건져 주소서.
나에게 귀를 기울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속히 나를 구해 주소서. 내가 피할 바위가 되시고 나를 구할 요새가 되소서.
주는 나의 반석이시며 요새이십니다. 주의 이름을 위해 나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소서.
내 원수들이 나를 잡으려고 쳐 둔 그물에서 나를 안전하게 지키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내가 주의 손에 나의 영을 맡깁니다. 진리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여, 나를 구원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 죄 가운데 사는 인생은 결국 자신을 영원한 허무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5,6절을 보면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인생의 허무함을 자연에 비유한 말씀입니다.
‘홍수처럼 쓸어간다’ 는 말씀이나 ‘아침에 돋는 풀같다’ 는 말은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존재인지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생이 이처럼 허무한 존재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3절을 보면 모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생을 흙으로 지으신 하나님은 또한 인생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하심으로 허무한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흙’ 이라는 말 대신에 ‘티끌’ 이라고 하여 인생의 허무함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생을 허무하게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우리 인간을 영원히 살 수 있도록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과의 언약에서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죄로 인하여 영과 육이 다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허무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허무하게 하신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죄입니다.
인간의 죄가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 전락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여기서 이처럼 인생의 허무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 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허무하게 소멸하게된 것도
그들의 죄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는 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암시가 있습니다. 5절을 보면 모세는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홍수’ 라는 말은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을 막을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심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고 한편으로는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켜 줍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에 대홍수를 통하여 인생들을 쓸어 가심으로 그들을 허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홍수의 원인 역시 다름아니라 세상에 관영한 인간의 죄때문이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광야에서 당신을 대적하는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치 홍수로 쓸어 가듯이 남김 없이 쓸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심각성입니다. 죄는 인생으로 하여금 허무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파괴력이 있습니다. 죄는 우리 모든 인생으로 죽음에 이르게 하였고, 노아의 가족을 제외한 온 인류를, 롯을 제외한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을, 여호수아와 갈랩을 제외한 온 이스라엘 백성을 허무하게 소멸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죄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인생들을 영원한 허무 가운데 빠지게 합니다. 여기서 영원한 허무란 영원한 멸망 곧 지옥 형벌을 말합니다. 성경은 지옥에 대하여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그저 캄캄한 곳이요, 오직 고통만 있는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죄는 바로 우리 인생으로 이러한 영원한 허무 가운데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죄와 관련된 기사가 많이 나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죄와 관련된 기사를 성경에 많이 기록하신 이유는 우리 인생들로 죄를 경계하여 영원한 허무 가운데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성경이 가르치고 지적하고 반복하는 바 이 교훈을 명심하십시오. 죄와 죄로 인해 닥치는 심각한 결과에 주목하십시오. 그리하면 죄를 멸리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러므로 한 샤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샤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샤람에게 이르랬느니라"(롬5:12)
“오직 오늘이라 일컬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팍케 됨을 면하라," (히 3: 13)
2. 하나님은 우리의 은밀한 죄를 당신의 얼굴빛 가운데 두십니다.
7, 8절을 보면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인생이 허무하게 되는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모든 죄는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 앞에 드러나게 되는 바 죄인은 주의 분노 앞에 떨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허무하게 소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다” 라는 본문의 말씀은 아무리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낱낱이 드러나게 된다는 말입니다. 특별히 ‘주의 얼굴빛’ 이라는 표현은 죄인이 자기의 죄를 숨길 수 없다는 강력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나님 나라는 해나 달의 비렴이 쓸데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계21:23), 이는 하나님의 얼굴빛이 얼마나 강렬한 빛인지를 암시해 줍니다.
실로 하나님의 얼굴빛은 그 빛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그 앞에 숨을 것이 없을 만큼 강렬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은밀한 죄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왜 무섭습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드러나지 않을 죄악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반드시 드러나 심판을 받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생이 은밀하게 범한 죄를 보시지 못한다면 죄가 두렵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지 못한다면 심판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지 못하는 죄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 간의 모든 행위를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십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까지도 지켜보고 계십니다. 사실 아담으로부터 타락한 본성을 물려 받은 우리는 죄에 대한 감각이 대단히 무딥니다. 어떤이들은 대단히 예민한 양심을 갖고 있고, 심지어 법없이도 살 수 있다고 말하며, 자신이 왜 죄인이냐고 항변하는 이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죄에 관해 자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그래도 양심이 예리하고 예민한 사람을 꼽으라면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뇨?"(19:12)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기도 깨닫지 못하면서 죄를 짓고, 또 죄를 짓고도 새까맣게 잊어버리는 인간에 대한 고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이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다소 뻔뻔하게 나마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아주 예민하고 예리하여 우리 자신의 실체를 안다면 마치 사람이 현미경을 눈에 끼고 살면 아무것도 못 먹고 못 만지는 것처럼 아예 양심이 괴로워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에 둔감한 것도 어떻게 보면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둔감해도 너무 둔감하다는데 있습니다.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래서 뻔뻔해도 지나치게 뻔뻔합니다. 보십시오. 아예 죄를 알고도 깊이 숨겨 두며 모르는 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의인인 체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신의 눈 속에 들보는 그대로 둔 채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제거해 주겠다고 달려 드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오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자기 딴에는 완전 범죄를 장담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앞에서 완전 범죄란 없습니다. 성경은 음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드러나리라고 했습니다(용 26 ’ 6 ; 잠 1 5 ’ 1 1 ).
예수께서는 숨은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다고도 하셨습니다(마10:26). 마지막 때에는 본인조차 새까땅게 잊고 있는 행위들을 하나하나 다 끄집어내어 말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마 25 : 35, 36). 사도 요한은 우리의 행위들이 다 행위책에 기록이 되고 있다고 증거했습니다(계 20 : 1 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눈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죄를 숨기는 대신 주께 자복하십시오. 죄를 자복하고 용서 받을 때의 그 기쁨이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죄를 자복함으로써 이 만족, 이 행복을 얻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꽤훌로 그 감정을 감출지 라도 그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잠 26: 26)
“내가 그 여러 악을 기억하였음을 저희가 마음에 생각지 아니하거니와 이제 그 행위가 저회를 에워싸고 내 옥전에 있도다끼호 7:2)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나니"(녹 12:2)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성도는 주의 분노 중에 세월이 가지 않도록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9-11절을 보겠습니 다. 9절에서 모세는 주
의 분노 중에 인생의 날이 간다고 했습니
다. 11절에서는 누가 과연 주의 진노의 능
력을 알고, 누가 주를 두려 워 하여 야 할 대로
주의 진노를 알겠느냐고 묻고 있습니 다. 사
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 가 지금 왜 이 말
을 하고 있 습니 까? 당시 이 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 아에서 범 죄 함으로써 광야 40년 세월 속에 다 죽어 갔습니 다. 당시 이 스라엘 백성들은 20세 이 상의 장년이 60만명 이 었으므로 단순 계 산만으로도 매일 40명 이 상이 죽어 갔다고 할 수 있습니 다. 그리고 성경 기록을 보면 하루에 250명 이 죽은 날도 있고 (민 16: 35), 무려 23, 000명 이 죽은 날도 있었습니 다(민 25 : 9). 상상컨대 이러한 날들이 흔하지 는 않았다 할지 라도 그 이 후에도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민 23 : 6) . 말
그대 로 심심치 않게 발생 했을 것입니다.
여 러 분, 그렇 게 힘 들게 애굽에서 나와서
이 토록 뭉텅 뭉텅 이로 허 무하게 죽어 가는 이
들을 바라보면서 모세가 생 각한 것이 무엇이
겠습니 까? 하나님 이 한번 진노를 발하시 면
정말 무섭 구나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래서 모세 는 ‘최 후에 남은 1 인’ 의 심정이 되
어 이 기 록을 남겼다고 할 수 있습니 다. 우
리가 죄를 범 한다면 우리 의 인생이 지 긋지 긋
하도록 진노 가운데 지 난다는 것을 가르치 기
위해서 말입니 다. ‘과연 이 것을 누가 알겠는
가’ 하는 1 1절의 말씀은 실로 우리 가 이것
을 얼마나 심 각하게 생 각하고 또 생 각해야
하는지를 전달해 줍니 다.
따라서 오늘 우리 는 진실로 알아야 합니
다. 하나님께서 우리 를 이 세 상에 보내신 것
은 탄식과 한숨 속에서 세월을 보내 라는 의
미가 아닙 니 다. 주 안에서 풍성 한 생명과 은
혜를 누리 라고 우리 를 이 세 상에 보내신 것
입니다(요 10: 10). 그런데 지 금도 얼 마나
많은 이 들이 풍성 한 은혜 와 생명을 누리 기는
커녕 탄식 과 한숨 속에서 보냄니 까? 얼마나
많은 이 들이 바깥 어 두운 데서 슬피 울며 이
를 가는 삶을 삽니 까? 이 모든 것은 그들이
진노하시 는 하나님 을 모르기 때 문입니다. 죄
에 관한 한 그대로 지 나치 시 는 법이 없으신 비애를 선명하게 보여주며 이를 읽는 많은
하나님 을 모르기 때 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그러 한 무지 로 인하여 하나님 을 두려 워 하지
않기 때 문입니다.
그러 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하
나님을 두려 워 하시기 바랍니 다. 하나님 의 진
노에 관해 배 우시기 바랍니 다. 여러분의 아
이 들, 그 사랑스럽 기만 한 아이들에 게 하나
님을 두려 워 하고 경외하는 데 참 생명이 있
사람들로부터 깊은 공감을 자아내는 구절입
니 다. 여기서 ‘우리의 년수가 칠 십 이요 강건
하면 팔십 이 라도’ 라는 말은 곧 ‘인생은 기껏
해야 칠십년, 근력 이 좋아야 팔십 년’ ( 공동번
역)이라는 말입 니 다. 즉 인 생 이 매우 짧음을
탄식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습니 다. 7 , 80
년이라고 하면 상당히 긴 세월인 것 같은데
사실 그것은 순식 간에 지 나지 않습니 다. 아
고, 은혜 와 복이 있음을 어려서부터 가르치 직 젊은 사람들은 이 말이 실 감이 나지 않을
시기 바랍니 다. 하나님 을 두려 워해서 손해 날 지 모르지 만 이제 생을 정리할 시기에 이른
일이 없습니 다. 하나님 을 두려 워해서 불행해
질 인생이 없습니 다. 오히 려 한 걸음 더 나
아가서 하나님 을 경외하는 사람치 고 잘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 다. 왜 이 것을 모릅니 까?
왜 이것을 깨 닫지 못합니 까? 깊은 깨 달음이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 다. 정녕 여
러 분은 하나님 을 두려 워 함으로써 주의 진노
가운데 세월이 흘러 가지 않게 하시 기를 바랍
니 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
히 지옥에 멸 하시는 자를 두려워 하라"
(마
10:28)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
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멤전 1: 17)
인생에게 주어진 세상의 시간은 영원을 준비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모세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
이요 강건하면 팔십 이 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 요 신속히 가니 우리 가 날아
가나이 다” 라고 토로하고 있습니 다. 이 말씀
은 인생의 유한함, 덧없음, 그리고 초라함과
분들은 이 말에 대 하여 절실하게 공감할 것
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십 시 오. 모세 는 그러 한
인생일지 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
픔뿐’ 이 라고 하였습니 다. 이는 마치 애굽 왕
바로 앞 에 서의 야곱의 말 같습니 다(창
47: 9). 사실 우리 가 우리 의 인생을 돌아보
면 수고와 슬픔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 의 인생 중에는 기쁜 날도 분명 있
습니 다. 하지 만 우리 는 “땅은 너로 인하여
저 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 야 그
소산을 먹 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 덤 불과 영경
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 을 것 은 밭의 채 소인
즉 네가 얼 굴에 땀이 흘러 야 식 물을 먹고 필
경은 흙으로 돌아가리 니 그 속에서 네가 취
함을 입 었음이 라 너는 흙이 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 : 1 7-19)는 하나님 의 말씀대
로 수고하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또 그 과정
에서 끊임없이 슬픔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
리고 그러 한 힘겨운 수고와 슬픔은 우리 에게
찾아온 기 쁨마저 도 없는 것 처 럼 만들어 버립
니 다.
이 렇게 볼 때 우리 가 이 세 상에 소망을 두
고 사는 것이 얼 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 다. 실로 이 세 상에 소망을 두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 드립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