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4:19-24)은혜 불감증을 치유하세요

ereducation 2022. 10. 31. 11:51

62:5~8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셀라).

하나님아버지, 저희들이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기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 되시고 구원이 되시고 산성이 되십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에게 우리의 마음을 토하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고 원수 마귀로부터 보호받고 복된 삶을 살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이 새벽에도 저희들이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아뢰어 위안 받고, 평화를 누리고 복을 받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 요한복음 1419-24.

 

1. 기독교는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입니다.

19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이 말씀 역시 예수님의 죽음과 승천으로 인해 불안해할 제자들을 위로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으로 일차적으로는 장차 제자들이 경험할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염두에 두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처럼 근심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을 위로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계속해서 현재형이 아니라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고통과 고난 속에 있는 인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들 종교의 가르침을 보면 대개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목표로 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보면 제행무상,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다는 등의

현재적 교설로 집착과 번민 가운데 고통하는 사람들을 깨우치려 하고 있습니다.

신도들 중에 자신의 고통스러운 문제를 말하면 주지는 “인생은 다 그런 것입니다" 라고 하거나

“실패와 이별은 누구나 겪는 문제입니다” 하면서 현상황을 말로써 위로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현재를 극복한 힘도 없고, 미래도 잘못 예측하고 있으며,

미래를 바꿀 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성도를 위로하실 때 거의 대부분 미래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창조주로서 미래를 다 아실 뿐만 아니라

미래의 모든 일까지 주관하실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언제나 이러한 미래를 바라보며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만 현재의 모든 문제를 극복할 힘과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미래의 약속을 믿을 때만이

현재를 극복할 힘과 능력을 얻을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시절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의 핍박이 극에 달하던 시기에 신앙을 지키던 한 그리스도인이 잡혀 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일이면 로마의 경기장에서 맹수의 밥이 되기로 결정이 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자 그의 딸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뵙고자 간청을 하여 간신히 면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딸이 떠나고 감옥의 문이 닫히자 간수는 측은하다는 듯이 그 사람을 보며 말했습니다.  “안됐군, 이제 자네는 영원히 사랑하는 딸을 볼 수가 없게 되었으니

그러자 그 그리스도인은 조금도 흔들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당신이 더 불쌍하오. 왜냐하면 나는 잠시 후에 천국에서 내 딸을 보게 되겠지만

당신 이야말로 잠시 후면 가족을 영원히 볼 수 없을테니 말이요

이것이 바로 현재가 아니라 미래를, 그리고 부활과 천국의 약속을 믿는 성도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성도 여러분은 세상 사람처럼 현재나 과거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찬란한 미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장차 나타날 영광에 대한 기쁨과 소망 속에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환란풍파도 이기고 능히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2, 성도들이 장차 앉게 될 곳은 하늘 보좌입니다.

20절에서 예수님은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거듭 말씀하시는 성부와 성자간의 본질적 일치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도들 사이에 있을 신비적 연합을 말씀하신 것입니다(17:21.26),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알지 못하고 경험할 수도 없는 이러한 신비적 연합이

과연 언제 있을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곧 ‘그날’ 이 언제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많은 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그날’ 이

비단 최후의 마지막 심판 때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령 강림으로 시작되는

새로운 교회 시대를 동시에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천국의 이중성에 관한 가르침으로서,

즉 그리스도의 초림과 성령 강림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되었고

구약의 모든 종말 예언은 성취되었으며 곧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온전히 완성된다는 것으로 우리 성도들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종말의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중적 성취와 완성의 진리 속에서 본절의 말씀을 볼 때

본절이 지니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이미 주님과 성도는 성령을 통해 신비적 연합을 이루어 하나가 되었고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들 속에 내주하여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제 우리 성도의 삶은 더 이상 한 개인의 삶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삶이므로

더욱 근신하며 거룩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미래성에 있습니다.

우리는 장차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예수님과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품고 계시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므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우리도 당연히 하늘 보좌에 앉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전6:3에서 우리가 천사들까지 심판하리라는 사도 바울의 말씀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성도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하늘 보좌에 앉는 축복과 영광을 누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는 본절의 말씀 속에서 장차 우리가 누릴 영광을 바라보며

아무리 현재의 삶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기쁨과 소망 속에서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곧 나의 십자가요, 그 부활은 나의 부활임을 깨달아

이 땅에서도 예수님처럼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부활의 능력을 행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이 놀라운 영광으로 인도할 수 있는 작은 그리스도들이 모두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을 때 은혜 불감증은 치유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면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구나!’ 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시들고 나약해진 많은 교인들을 새롭게 되살릴 수 있는 비결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 중에는 말씀을 아무리 보아도 아무런 감동이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은혜 불감증’ 이라는 심각한 영적 질병에 걸려있는 분들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무리 말씀을 듣고 보아도 아무런 감동도 느끼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성경을 올바로 읽고 해석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올바른 해석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런 방법은 전혀 새로운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단지 알면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속의 말씀입니다.

복주시고 은혜주시고 믿음주시고 환란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병을 고치시고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말씀들을 읽고 내 것으로 믿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이처럼 쉬운 방법을 말씀을 읽을 때에도 적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는 자에게만 말씀을 읽는 자에게만 기다리는 자에게만 기도하는 자에게만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은 언제 어느 때 어떻게 이루어질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때에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아무리 강대상에서 말씀을 전하여도 듣지 않고 행하지 않고 따르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

변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제부터라도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읽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평범하게 보이던 기록과 말씀이 보다 살아있는 의미를 가지고 다가올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어렴풋하게만 들리던 주님의 말씀 속에서 천둥을 울리는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사람의 말로 들었던 사도들의 말씀이 성령과 그리스도의 계시로 다가오는 새로운 감동과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를 말하고 미래를 꿈꾸고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일들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도인 우리는 예수님 품 안에 들어 갈 것이고 예수님은 하늘 보좌에 앉으실 것이므로 결국 우리가 앉는 자리는 하늘 보좌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또 성경 모든 말씀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아 은혜 불감증이 치유되고 나 한 사람만이라도 교회를 새롭게 하는 성도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