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13:22-26)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시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란 날에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환란에서 건져 주실 뿐만 아니라
저희들을 영화롭게 하시는 주님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놀라우신 은혜에 보답하는 길은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임을 깨달아 알고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요한복음 13장22-26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라고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보인 반응이 22절 말씀입니다.
22 제자들이 서로 보며 뉘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
예수님으로부터 믿기 어려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계속해서 서로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마음속으로 과연 누가 예수님을 팔 것인가 의심만 하고 누구도 물어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23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의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왜 누워 있느냐 하면?
그 당시의 식사하는 자세입니다. 이 말씀은 유월절 예수님과 제자들이 마지막 만찬 때입니다.
유대인들의 식사는 시간이 많이 걸리어 사람들은 최대한 편안한 자세를 취하여 식사를 합니다.
그래서 옆으로 비스듬히 기대어 오른손으로 음식을 먹고,
왼손으로는 턱을 괴거나 식탁에 기대는 자세를 취합니다.
예수의 사랑하는 자는 마침 예수 바로 옆에서 품에 안긴 듯한 자세로 식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의 사랑하시는 자’ 가 누구냐 하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 자신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복음에서 이 표현을 여러번 사용하였습니다(9:26; 20:2; 21:7).
그가 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의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였을까요?
자신이 생각할 때에 자신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고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 가운데 자존감이 떨어진 아이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의 특징이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입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나는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매사에 의욕이 없고 생기도 없고 사람들 앞에서 주눅들고 자기 표현도 잘 못합니다.
이것이 방치되어 심화되면 외톨이가 되고 대인기피증에 걸리고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앓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아이는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고 활달하고 밝고 당당합니다.
이것을 영적인 상태로 살펴본다면 내 자신의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고,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된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게시는 것입니다.
사43:1~3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험한 곳에 처하여도 하나님만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이라는 확신만 가지고 살면 됩니다.
우리는 절대 실패하지도 않고 망하지도 않고 죽지도 않습니다.
고후4:8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여러분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서신을 보면 항상 서두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혹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이라는 표현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정체성을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 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도와 달리 이방인의 사도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분명한 정체성을 가지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였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수많은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서신서를 기록하는
엄청나고도 놀라운 복음 사역의 업적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주님의 사랑하시는 제자로 규정했던 사도 요한 역시 사랑의 사도로서 순교 당하지 않고
최후까지 남아 요한계시록과 요한1,2,3서의 주옥 같은 귀한 성경들을 남겨 초대 교회의 큰 기둥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확실한 정체성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하여도 세상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 믿는 크리스찬이다.
나는 교회에서 하나님에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다. 라고 당당하게 자신을 밝히지 못하게 되고 힘없고 연약한 종교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확고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세상속에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세파에 시달리게 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능력 있는 삶도 살지 못하고,
우리 모두가 이렇게 힘을 잃고 살아간다면 세상을 살릴 수도 없고
오히려 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침체의 나락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성도와 제자로서의 분명한 정체성을 정립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과 같이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감격과 함께
사도 바울과 같이 사도로서의 사명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힘있게 증거하는 능력있는 제자요
성도들이 되어 힘차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가야 할 것입니다.
24 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올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한대
베드로가 요한에게 예수님을 팔자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신호를 보냈습니다.
베드로가 무엇 때문에 자신이 직접 묻지 않고 요한을 통해서 알려고 했는지에 대해
그가 멀리 떨어져 앉아 있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이보다는 요한이 사랑받는 제자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여기에서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참지 못하는 베드로의 성급한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그리고 베드로 역시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사람이 가롯 유다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으므로 요한을 통하여 궁금증을 풀고자 하였습니다.
25 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오니이까
26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롯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주여 누구오니이까’ 란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가롯 유다를 지명하시지 않고
대신 떡을 한 조각 집어서 주는 것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앞당겨 유월절 만찬장에 포도를 발효하여 만든 떡과 찍어 먹는 식초도 있었습니다. 당시 식사 풍습에는 주최자가 식사 참여자들에게 접시에 담긴 떡을 초에 찍어 주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이상히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의 질문에 예수님은 큰 소리로 다른 제자들도 모두 듣도록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다른 제자들은 요한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조차도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당시 요한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깨달았으나
너무나 큰 놀라움으로 인하여 차마 말을 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감한 문제를 베드로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본 단락의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제자들의 영적 무지를 일관되게 보여 준다는 점에서
당시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의미를 정확히 몰랐다고 보는 것이 합당한 것입니다.
만약 이때 요한이 가롯 유다가 배반자란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면 베드로에게도 말하였을 것이며 큰 소란이 발생하여 예수님이 팔리는 것을 막으려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유다에게 떡을 직접 찍어 주셨을까요? 그 이유는,
첫째는 가롯 유다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유다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유다의 운명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둘째는 제자들이 유다가 예수를 팔 자라는 것을 지금은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 그 모든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팔자에게 조차도 이렇듯 사랑과 우정의 표시로 떡을 찍어서 주셨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죽음이 경각에 달렸을지라도 예수님을 외면하지 말고 모른다고 부인하지 말고 예수님을 원망하지 말고 예수님의 뜻에 따르고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선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복과 은혜를 풍성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을 끝까지 믿음으로 달려갑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저희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말고 세상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심도 잊지 말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심을 확실하게 믿어 어려운 가운데에서 더욱 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고 하나님을 전함으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