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요12:46-50)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ereducation 2022. 4. 6. 13:13

118:6,7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저희와 함께 하신다는 확고한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언제나 저희편이 되셔서 모든 일에 도와주시므로

악한 원수 마귀가 저희를 공격해도 하나님께서 다 막아주시므로

두려움이 없이 편안하고 안전하게 살아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요한복음 1246-50.

 

46절에서 예수님은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빛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을 어두움 가운데 거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둠 가운데 거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두움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이고,

또 어둠에 그대로 남아 있지 않게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금까지 모든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5:8 말씀에서 모든 인간의 상태를 너희가 본래 어두움이더니 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어두움은 무엇을 뜻합니까? 죄로 타락한 모든 사람이 머물러 있던 자리를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어두움에 속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어두움 가운데 있다는 것은 인간의 절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라는 요한의 증거는 참 빛, 즉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심으로 모든 죄를 사해 주실 참 메시야되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절망적인 인간의 현실 속에 직접 오셔서,

우리에게 어두움 가운데 계속 머물러 있지 않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일러주셨습니다.

그 길은 바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며, 그것만이 유일한 탈출구가 됩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는 죄악의 어두움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어두움’은 사람이 어두움 가운데 거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게 하는데

흑암이란 일차적 의미 이외에도 무지, , 숨는 것, 눈이 먼 것, 심판 등을 나타낼 때 쓰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 단어가 사용된 것은

그들의 실상이 어떠한지 충분히 알게 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며, 참되게 사는 법도 알지 못합니다.

영적 지식이 전무한 자들입니다. 이들 속에는 기쁨이나 평안이 없고, 선을 행하려는 갈망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불행하고 절망적인 상태가 어두움 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밝은 빛으로 오셔서 어두운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셨습니다.

4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이라고 하신 말씀은 내용적으로는 어두움만이 가득찬 이 세상에 예수님께서 생명의 빛으로 오셨음을 말씀하신 46절의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계속적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구원받지 못한 인류가 처해있는 위기에 대한 아주 적절한 표현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위기나 식량의 위기, 자원 고갈의 위기 등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본질적인 위기이며, 탈출구가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입니다.

6:23 ‘죄의 삯은 사망’ 이라는 선포가 인류가 위기에 직면한 실상을 잘 알게 합니다.

인류는 이처럼 죄로 인해 이미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 이 심판의 문제를 해결할

어떤 방법도 스스로 찾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이와 같은 상태에 있지 않게 하시며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미 실형이 선고된 인생들을 멸망에서 구출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녹19:10에서 말씀하신 ‘잃어버린 자’ 의 개념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던 인류의 실상을 잘 알게 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직시해야 할 것은 예수님을 아직도 여전히 거부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실상입니다. 불신자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실제로 사형이라는 최고의 실형이 선고된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것 이외에는 사면의 가능성이 일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한편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란 말씀은 예수님께서 심판자의 자격이 없다는 의미이거나, 예수님께 의한 심판이 결코 없다는 의미로 오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차적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심판을 위함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초림은 심판의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구원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 주시기 위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림에는 심판이 없을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장차 훗날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더 큰 경각심을 줍니다.

초림으로 주어진 구원의 기회를 잡지 못할 때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의 두려움으로 맞이하게 될 것이 암시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48절에서 선언되고 있습니다.

 

48절에서 예수님은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47절에서 선언된 구원의 메시지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받게 될 심판에 관한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으나 예수님을 거부하는 이들은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합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에 참예하기도 하고 두려운 심판에 떨어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사건건 비난했으며 끝내는 예수님을 죽이고자 결의했는데, 결국 마지막 날에는 그들이 마음대로 무시하고 비난했던 바로 그 예수의 입에서 나온 그 말씀으로 심판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요지입니다.

중보자로서 자신의 몸을 화목제물로 아낌 없이 바치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평화를 이룰 수 있는 마지막 통로이며, 마지막 기회입니다. 따라서 이 기회를 상실하는 이들에게는 절대 다른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불신자들이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곧 구원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은 심판을 자초하는 일임을 알고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지도자들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종교적 열성이나 그밖에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앞에 놓여진 관문입니다.

이에 대한 선택은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 곧 영접하는 것과 거부하는 것이며,

그 선택의 몫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49절의 내가 내 자의로 말 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이 말씀은 ‘내가 무엇을 말하고 또 무엇을 주장해야 할지 친히 나에게 명령을 주셨다’ 가 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이 무엇을 말하고 또 무엇을 주장하든지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셨고, 그 효력이 계속 남아 있는 것이므로 원천적으로 예수님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하면 아버지의 계명을 거부하는 것이 됨을 알게 하십니다.

예수님이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쫓아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50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하시니라

‘그의 명령’은 ‘성부 하나님의 명령 혹은 계명’ 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성자 예수님의 말씀 혹은 행동’ 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명령’이 ‘영생’ 이란 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계명 혹은 예수님의 행동 가운데 영생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선언이 진리임을 밝히는 것임과 동시에 더 나아 가서는 앞으로 있을 예수님의 성육신하신 목적이자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절정이라 할 수 있는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영생을 보장하는 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은 예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으심과 연관하지 않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44-50절에서 성부 하나님과 자신의 동등성 및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최종적으로 자신만이 유일한 영생의 길이심을 성부 하나님의 명령이란 표현으로써 선포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가장 먼저 메시야를 접하고 그 말씀과 표적을 보는 축복을 누렸지만 오히려 잘못된 편견과 자기 의에 도취된 나머지 예수님을 배척함으로써 도리어 저주와 심판의 대상이 되는 불행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그들의 실패를 보며 마음을 비움으로써 더욱 겸손하고 갈급한 심령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과 은혜를 옥토와 같은 마음으로 받아 더욱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어두움에 갇혀 있는 저희들을 구원하여 주시기 위하여 빛으로 오셔서 구원의 길을 밝혀 보여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주로 오신다는 사실 또한 무겁게 받아 드리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이 점점 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부모형제자매들과 남편자녀들을 보고 또 친지와 이웃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과 간절한 마음으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여 그들을 건져내는 저희들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