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죽음의 인생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

ereducation 2022. 4. 6. 11:49

119:109-111 나의 생명이 항상 위경에 있사오나 주의 법은 잊지 아니하나이다

악인이 나를 해하려고 올무를 놓았사오나 나는 주의 법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주의 증거로 내가 영원히 기업을 삼았사오니 이는 내 마음의 즐거움이 됨이니이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악한 마귀로부터 항상 위협을 당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고 살아 가므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 있습니다.

마귀의 종 노릇하는 악인들이 저희를 넘어뜨리려고 함정을 파 놓았으나

저희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으므로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저희의 영원한 재산이며 저희 마음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므로 오늘 이 새벽에도 주의 전에 나아왔사오니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준행하겠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찬송가 256장 눈을 들어 하늘보라, 요한복음 1133-35.

 

1. 죽음의 인생을 안타까워하시는 예수님

33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 본문을 직역하면 ‘그분은 심령으로 깊이 탄식하셨으며 스스로 흔들리셨다’ 가 됩니다.

여기서 ‘통분히 여기시고’ 는 예수님께서 꿇어 오르는 분노를 속으로 삭이신다는 뜻이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노여움을 폭발시키셨다거나 초조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몸이 떨릴 만큼이나 그 마음이 괴로우셨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마음속에서부터 깊은 탄식의 신음 소리를 내신 것이라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민망히 여기사’는 감정적인 홍분이나 혼란과 같은 마음의 동요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분노의 물결이 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괴로움으로 인한 심적 동요로 이해하는 것이 더 무난합니다.

예수님의 감정이 심히 착잡한 상태였음을 잘 보여줍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지니신

동시에 지극히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셨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이처럼 착잡하게 만들고

저절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올 정도로 괴롭힌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신학자는 이 세상에 만연해 있는 죄와 죄의 결과로 인한 사망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엄청난 질병, 그리고 죽음, 죄가 이 세상에 가져다 준 황폐함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이 이처럼 심하게 동요되셨다는 것입니다.

메시야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부활과 생명의 실체로 오셨지만

죄와 사망이 여전히 기승을 부려 사람들도, 특히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마리아도

슬픔과 낙심에 빠진 것이 예수님의 분노를 표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해석이 상당히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신학자는 예수님께서 죽음이 승리하는 광경을 목격하시고,

마리아와 함께 온 유대인들의 연약한 믿음 때문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역시 전후 문맥으로 볼 때 상당히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부활과 생명이 되신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이 메시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마리아의 신앙고백까지 들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고, 절망하고, 통곡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활과 생명되시는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슬퍼하며 통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현상입니까?

그런데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심판 받지 않으며, 영원한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죄의 삯으로 사망하고 심판 받아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모른 체 죽음 그 자체 만으로 슬퍼하고 괴로워하고 죽음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탄식은 끊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찬양 가사처럼 믿는 자여 어이할꼬?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2. 긍휼히 여기시는 예수님

34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장사된 무덤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서 물으셨다기 보다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지난 상태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주지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특별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종종 이러한 질문하시곤 합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만난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나,

여리고에서 만난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신 것 등도 이와 유사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물으신 것은 기적을 행하시기 위한 전 단계인데

그 당시 옆에 있던 제자들 조차도 과연 이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그를 어디 두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 질문은 나사로가 지금 어디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주님은 나사로가 무덤 속에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는 것을 아셨지만

일부러 사람들이 듣도록 그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그 옛날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고 하나님이 두려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 것과 일맥 상통합니다.

주님은 지금 나사로의 죽음으로 우는 자들에게 ‘보라 젊은 나사로도 무덤에 있다. 너희들도

저 나사로처럼 죽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무언의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들의 그러한 불행한 운명을 동정하여 우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법관과 같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율법을 조금만 어겨도 용서하지 않으시고 적각적으로 정죄하시는 무서운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만은 아니십니다.

또 헬라인들이 만들어낸 신화 속의 신들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나 사랑이 없는 신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조롱하고 그 운명을 장난꺼리로 만드는 비정한 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인 된 인간의 처지를 크게 동정하고

그런 인간의 슬픔과 고통에 모른 체 하지 않으시고 함께 참여하는 분이십니다.

그 동정심 때문에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고

그 동정심 때문에 친히 대속 제물이 되사 죄인들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주님은 그 동정심 때문에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죄인들을 변호해 주는 영원한 중보자의 일을 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주님은 이렇게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민망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믿음만 중요하게 여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긍휼도 베풀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는 주님의 이러한 마음을 품지 않고는

참된 이웃 사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또 이웃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열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부디 주님을 닮아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돕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3. 눈물을 흐리신 에수님

35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정확히 번역하면 ‘울기 시작하셨다’ 가 됩니다. 조용히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눈물은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신 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계실 뿐만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감정들

슬픔, 기쁨, 괴로움, 즐거움, 배고픔, 피곤함, 등등 육신을 가진 인성을 취하신 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십니다. ‘체휼한다’ 는 말은 동정한다는 뜻입니다.

이방신과는 달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이해하시는 분임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신은 참신이 아니며,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의 규율이나 교리는 인간을 억압할 뿐이다.

예수님은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또 눈물까지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왜 눈물을 보이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불신앙입니다.

인간들의 불신앙적으로 닥쳐질 비참한 결과를 아시는 주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슬픔을 이기지 못해 울기까지 하신 것입니다.

19:41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우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주님의 권고를 듣지 않고 주님을 대적하는 불신앙 때문에 우신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 대신 우신 내용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인간의 불신앙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인간의 불신앙을 가장 괴로워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보일 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실천하는 것을 주님은 즐거움으로 삼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모두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며

또 그 눈에서 눈물을 씻겨 드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지옥으로 떨어지는 영혼들을 민망히 여기시고 통분히 여기시고 우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저희들에게도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주셔서 영혼을 건지고 살리는 일을 잘 감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