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
인간의 삶을 사자성어로 생로병사라 한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그 사명을 감당하게 하기 위하여 각자에게 재능을 주시고 꿈과 비전을 주신다.
그러나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의 사명을 망각한 체 오로지 자기자신을 위해 살아간다.
자신만을 위한 삶의 출발은 욕심의 삶이고, 자신만을 위한 삶의 과정은 죄악 된 삶이고
죽음을 향한 삶이며 자신만을 위한 삶의 결론은 심판의 삶이고 멸망의 삶이다.
그런 삶을 사는 우리들에서 하나님께서는 끊임없이 찾아오시어 우리를 부르신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의 삶은 의미와 이유와 목적이 달라진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자신을 위한 삶보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이 자신도 참된 기쁨이고 즐거움이고 행복한 삶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으로 각자의 분야에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이 우리의 사명이다.
여러분이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 나와 의사, 박사, 변호사, 국회의원, 기업가, 등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도 자신을 위한 삶을 살면 결국은 불행의 삶이고 멸망의 삶이고 실패의 삶이다.
낮고 천하고 보잘것없고 볼품없고 다른 사람이 보기에 부끄러운 직업을 가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삶이고 생명의 삶이고 성공의 삶이다.
예배시간 마다 하나님께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항상 최선을 다하고 그로 인하여 얻어진 소득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며 세상 속에서도 죄짓지 않고 하나님 말씀 따라 순종하며 살면서 하나님을 자랑하고 나타내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명이 끝나면 이 세상의 삶을 마감하는데 그것이 바로 죽음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음을 맞이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의 원죄로 인하여 죽음을 맛보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빨리 죽고, 늦게 죽고 하는 죽음의 시기 또한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
악한자가 장수하고 죽을 수도 있고, 선한 자가 일찍 죽는 수도 있다.
그러면 성경에서 성도의 죽음의 사례를 살펴보자.
1) 이 땅에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보실 때 : 거지 나사로
2) 이 땅에서 거부로 장수하고 생명의 연수를 다 하고 죽을 때 : 아브라함, 이삭, 야곱
3) 나이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명을 다 감당하고 죽을 때 : 스데반,
4) 죽음으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믿도록 하실 때 : 예수님의 제자들, 순교자들
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 죽는 경우 : 나사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나사로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나사로는 두 여동생 마리아와 마르다와 함께 베다니에 살고 있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3km 떨어져 있는 강림산 기슭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그곳은 문둥병자와 소외된 사람들이 격리되어 사는 사회로부터 냉대받는 곳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메시아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집에 직접 방문 하실 정도로 그들을 각별히 사랑하셨다.
그래서 3남매는 더욱더 믿음이 강하여지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오빠 나사로가 중병에 걸리고 만 것이다.
두 자매에게 생명 줄과도 같고 나이도 젊은 오빠가 죽는다는 것은 받아 들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두 자매는 예수님께서 오시면 오빠를 고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가 곧 죽어간다는 다급한 소식을 전해 듣고도 즉시로 가시지 않고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또,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라시며 이틀을 더 계신 것이다. 그리고는 나사로는 병으로 죽어 버렸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위해서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신 걸로 알고 있다.
즉 예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되심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밝히시기 위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자들과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 할 수 없었다.
모든 사람들의 어떤 병도 다 고쳐주시는 예수님께서 정작 그렇게 사랑하시는 3남매의 오빠
나사로가 죽어 간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도 알아듣지 못할 말씀만 하시며
바로 찾아 가지 않으시고 이틀이나 지나서야 비로서 가자고 하신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죽은 자를 살리실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란 사실을 몰랐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한 사람으로 알고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예루살렘은 위험한 곳이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사이비 이단으로 알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의 여러가지 병들을 고치시므로
선지자 중의 한 사람쯤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식일을 어기며 병을 고치기도하고,
유대인들이 하나님 다음으로 존경하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자신이 있었다고 하고,
아브라함이 자신을 보고 기뻐하였다고도 하며,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신성모독이라 사이비 이단이라 하며 반발하자
예수님께서는 너희 유대인들 속에 진리가 없어 나를 알아 보지 못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그곳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여 이곳으로 피신해 온 것이다.
그러니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쪽으로 가시지 않은 것은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을 것을 두려워하여 가시지 않은 것으로 오해하고
지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는데 그리로 가시려 합니까? 하고 만류한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지금 나사로가 잠들어서 깨우러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제자들은 차라리 잠들었으면 나겠습니다라고 하며 나사로가 살아있을 때는 안 가시고
죽고 난 후에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에게 원망과 불평의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나사로가 죽었다 내가 가지 않은 것은 너희로 믿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는 가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제자들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러 간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기를 각오하고
죽은 나사로를 만나러 간다는 말씀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니 도마 같은 제자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베다니에 예수님의 일행이 도착하자 나사로는 죽은지 이미 4일이나 지난 뒤였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곳에 계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원망서린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라고 자신의 믿음을 말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네 오빠가 다시 살아 나리라’고 말씀하시자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 날 줄 아나이다’라고 부활 신앙을 말하였다.
금방 마르다가 예수님이 구하시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자신의 믿음을 말했지만
예수님께서 지금 당장 살리신다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을 남기신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는 몸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서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는 육신도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자가 살아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들어 간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질문에 마르다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이렇게 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제자들보다 더 좋은 믿음을 가진 것을 알 수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부르나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을 주시라고 부르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들이시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는데
그것은 수제자인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리아를 불러 오라 하셨다. 마리아와 많은 조문객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리고 마리아 역시 마르다와 같이 예수님이 계셨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울자 뒤따라온 모든 조문객들도 같이 울었다. 그 모습을 보신 예수님도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은 세번 눈물을 흐리신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실 때,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기도하실 때 나사로의 죽음에 흘린 눈물은 인간의 죽음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불상해서이고
예루살렘의 멸망에 흘린 눈물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유대인들이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유대인들이 불상해서이고 겟세마네의 기도에 흘린 눈물은 인간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십자가에 못박히실 예수님이 인간의 입장에서 겪을 고통을 생각해서 흘리는 눈물일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죽어서 나흘이나 지나 벌써 섞은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셨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중요한 일을 하실 때 먼저 기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셨다.
마리아, 마르다, 그리고 조문객들과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도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이심과 하나님은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모든 것을 들어 주신다는 것과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선포하심으로 그들을 믿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더 이상의 말이 필요치 않다. 그러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 무덤을 걸어 나온 것이다.
세상만물을 창조하실 때도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고
물과 물이 하늘과 땅으로 나뉘어라 하시니 나뉘었고
식물과 동물이 종류대로 있으라 하시니 그대로 생긴 것이다.
말씀으로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죽은 인간을 살리신 종교는 기독교외에 세상 어디에도 없다.
이 정도의 능력이 되야 하나님이 되는 것이지 쪼잔하게 돌덩어리에 절하고 나무에 절하고
해와달에 절하는 그런 종교와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 모든 사실을 처음부터 다 똑같이 지켜본 사람이지만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마리아와 마르다, 나사로, 그리고 제자들은 확실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었지만
오히려 이 사건으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의 한 것이다.
눅16: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그 당시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있는 반면에
2000년 전의 그 사건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아도 성경 말씀을 통해서 믿는다.
그것만 봐도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감사하고 찬양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자